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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디지털 시대, 문학이 향해야할 길
“한국 문학은 왜 이 모양이야?”
매년 10월, 노벨상 시즌만 되면 한국은 자조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다. “한국은 왜 상을 못타지?” 문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매년 난해한 이름의 외국 작가가 수상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독자는 늘상 한숨이다. 단순히 상을 못타는 것 이상으로 한국 문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 문학은 재미가 없다. 그런 얘기가 자꾸만 나돈다. 혹자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텍스트는 독자가 절반을 완성한다’는 문장이 현대 비평의 한 축에 자리하는 점을 두고보면, 대중의 외면을 작품성과 따로 떼놓고 볼 일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는 단순히 독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이미 여러 비평가들이 한국 문단에 어떤 근원적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비평가 오혜진은 문제가 K문학이 문단 권력에 휩쓸린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신경숙 표절 사건을 거론하며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그 퇴행의 내용들이야말로 지금의 ‘몰락’을 초래한 한국문학의 어떤 ‘체질’을 구성하고 있다” 말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현대 독자는 보다 자신의 윤리(취향)에 맞는 소설을 요구한다.
"문제는 독자들이 자기 얘기인 것 같다는 느낌을 문예지나 단행본에서 못 받는 것이다... ‘독자들이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기 위해 벌이는 취향의 각축전’에 영합해야 한다... 젊은 독자를 잃은 한국문학/비평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 혹은 방언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애도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K문학/비평이 없는 세계는 축복이며, 거기서 21세기의 독자들은 압도적인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중)
오혜진에게 다시 묻는다. 문단 권력에 종속적인 문학의 비윤리성 개혁이 정말 독자들의 요구냐고. 그녀가 그렇게 울부짖었던 퀴어-페미니즘 문학이 복권한 뒤로 독자들은 만족했냐고. 오혜진은 현 한국 문학의 문제가 작가나 작품의 문제가 아닌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문제’임을 명확히 밝혔지만, 이 문제를 권력의 관점에서 풀어내 일반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다.
한편 비평가 백지은도 작가-독자 사이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녀도 작가-독자 간 소통의 부진이 문학계의 시대착오적 성격 때문이라 말한다.
“이 시대 '한국문학'에 독자들이 냉담한 것은 '재현장치'로서 무능하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재현하는 데 안주해 온 문학(사)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젊은/변화된 독자들이 요구하는 학습과 경험에 필요한 지적, 문화적 자원에서 '한국문학'은 탈락했다. ...... '재현 너머' 혹은 '재현 아닌' 재현은, 서사를 주로 시각적 상상력에 의지해 수용해 온 대중적 감수성과 특히 멀어지는 결과에 이르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서사성의 결핍', '난해시의 불통' 등을 문제 삼았던 대중-독자들의 불만이, 오늘날 대중-독자들이 문학에서 자기 얘기를 못 찾겠다든가, 문학이 대중-독자를 교양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싫다든가 하는 불평에까지 이어진 것으로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현에 대한 탐구가 재현의 실패를 가져왔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대중-독자들의 불신과 냉담을 부른 문학의 무능도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요컨대 재현의 임계/한계/경계에 대한 문학의 첨예한 고민은 '대중적인 것'의 형질 변화를 유도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 (백지은, 《‘K문학/비평의 종말'에 대한 단상(들)》 중)
백지은 역시 현대 한국 문학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포착했으나, 주범으로 ‘재현장치’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적이다. 심지어는 작가가 심오하게 고민한 ‘재현’의 문제에 독자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뉘앙스마저 풍긴다. 독서란 유혹 혹은 유희의 일종이다, 라던 수전 손택의 말을 기억하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며 대중은 매체의 ‘재미’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문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전반에 걸쳐 게이미피케이션 현상이 관찰된다. 현대 독자가 과연 ‘지적, 문화적 자원’으로써 문학을 원하는가? 시대착오적인 것은 독자인가, 작가인가.
한국 문학은 중대한 시대착오에 빠져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오며 ‘독자’는 변화했다. 오혜진과 백지은 모두 작품에 습관적으로 담기는 이데올로기나 내용을 지적했지만, 실상 독자들이 느끼는 건 내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전에 지적했듯 작품이 취하는 태도와 형식 어딘가에 구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 부분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잔재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는 아직 해명되지 못했다.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 문학(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문학성과 대중성을 분리할 수 있는가 등 – 논의를 가로막는다. 일련의 문제에 대한 사회 전체의 합의 없이는 한국 문학에 대한 진단도 이뤄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펜을 든 것은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하기 위해서이고,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무하기 위해서이다. 미욱한 솜씨나마 함께 문학을 즐기자는 마음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디지털이 보급되며 현대인의 시각은 질적으로 변화했다. 무엇이 변화했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하자.
디지털 : 현실적인 가상, 가상적인 현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시체를 가지느냐 아니냐이다. 아날로그 사진 속 대상은 실제 현실에 존재했던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현실(혹은 과거)를 보여주지만, 디지털 사진 속 대상은 그렇지 않다. 색감, 배치, 원근 뿐 아니라 실제 찍힌 대상까지도 얼마든 편집·합성될 수 있다. 디지털 가상이 아날로그 현실을 대체했다.
이는 비단 사진만의 얘기가 아니다. 역사 이래 지금만큼 ‘가상’이 보편화 된 시대는 없었다. 오늘날 우린 쉽게 가상현실(VR)을 체험할 수 있다. 한편으로 현실에 직접 가상을 불러오는 증강현실(AR) 기술도 발전했다. 가상을 현실로 불러온 사례 - 복제 양 돌리는 이제와선 옛 이야기가 돼버렸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가상假像이란 단어에선 더 이상 ‘거짓’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의 가상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presentation란 의미에서 아날로그 현실보다 더욱 실제적이다.
“디지털 시대의 현실은 미리 주어진 채(‘datum’)로 카메라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느새 현실은 카메라와 더불어 구성되고 합성되고 생성되는 어떤 것, 즉 만들어지는 것(‘factum’)으로 여겨지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이미 존재하는 것의 뒤늦은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선제적 현시presentation다.” (진중권, 《이미지 인문학》 중)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이 무의미해졌다. 가상과 실재는 이제 불가분의 관계다. “기술의 변화는 당연히 미학의 변화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근래 소비자는 ‘현실적인 가상, 가상적인 현실’을 욕구한다. 포스트모던에서 이 갈증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된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해 현실 이상의 현실감을 주는 방법 (극사실hyperreal)
상상과 현실을 중첩시켜 현실 바깥의 경험을 주는 방법 (초현실surreal)
이 때 ‘하이퍼 리얼’은 절대 현실의 단순 재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철저히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불완전하고 군데군데 비어있다. 해석할 수 없는 정보가 현실엔 넘쳐난다. 그러나 창작물에서 그리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용자는 창작물 속 모든 장면을 아래를 내려다보듯 체험하고 빈 곳 없이 꽉 찬 느낌, ‘현실 이상의 현실감’을 경험한다. 초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현실에선 경험할 수 없는 가상 체험을 통해 수용자는 역으로 현실 뒷면에 숨겨진 가상 세계를 현실처럼 감각한다. 이렇듯 디지털 수용자들은 현실과 가상이 소통하는 독특한 경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영화 산업은 두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다. 영화의 최소 구성요소는 숏shot이다. 하나의 숏 안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미 수많은 이미지들이 결합돼 있어 글과 달리 감상자가 쉽게 분석할 수 없다. 여기에 거대한 스크린, 큰 음향이 더해지는 순간 감상자는 현실을 잊고 영상에 온전히 몰입하게 된다. “영화는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 투명성에서 우린 실제 이상의 현실감을 체험한다. 한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은 가상의 배경, 사물을 현실로 소환한다. 영화 속에서 우린 사후 세계를, 유령을, 우주를 경험한다. 일련의 체험을 거치고 감상자는 영화 속 가상을 마치 실제처럼 느끼게 된다. 가상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한편 현실에 가상을 대입해보는 순환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장이 연동한다고 말한 건 부르디외였다. ‘현실적인 가상, 가상적인 현실’에 대한 독자의 욕구는 문학장으로도 확장된다. 새로운 매체로 가상에 익숙해진 독자는 문학에도 극사실과 초현실을 요구한다. 오늘날만큼 픽션에 현실성을 강조한 시대가 있었던가? 그와 동시에 판타지 소설이 판형에 찍듯 나오는 시대는? 바로 이 지점에 문제가 자리한다. 한국 문학은 독자의 요구를 맞추는 데 실패했다.
노-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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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이 글을 썼음. 치열하게 고민하면 뭐하나. 주제가 이미 시대착오적인데.
저 단락만 봐서는 딱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나는. 독자 탓하는 소리로는 안 들리는데
"'대중적인 것'의 형질 변화를 유도하는데 실패했다"는 표현에서 난 문제를 느꼈음. 독자가 문학을 선택하기보다 문학이 독자를 가르치고 바꿔야하는데, 요즘 문학은 그러지 못했다는 식의 태도가 굉장히 오만하게 느껴졌음. - dc App
흠... 문학의 주된 기능은 오래전부터 재미+가르침이라고 나는 들어왔는데, 이때 가르침을 단순히 프로파간다나 팸플릿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모든 진지한 소설은 독자에게 이전과 다른 세계를 보여주겠다, 머리통을 깨부수겠다는 다짐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함. 물론 그걸 잘 실천하는 작가는 극소수지마는... 아무튼 근대소설도 독자를 계몽하는 역할을 도맡아온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런 욕망이 소설에서 사라질 순 없다고 봐서 잘 모르겠네. 혹시 내가 님의 주장을 과대해석하거나 오독한 거라면 고쳐주면 고맙겠음
요컨대 마거릿 앳우드는 작가는 대중을 위해서, 또는 특정한 몇몇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이상적인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했거든. 그렇다면 문제는 작가가 독자에게 선택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독자를 선택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그걸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듦.
castorp/ 전반적인 수준에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한국작가, 한국독자, 이런 식의 프레이밍이 실재를 가린다고 보는 거야?
글에선 자세히 다루지 못했는데 디지털 시대에 들어오면서 가상에 대한 요구만 달라진 건 아님. 이렇듯 선택권은 독자/수용자에게 있다는 태도, 수용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에 관여하려는 것도 이 시대 큰 특징 중 하나임. TV와 유튜브의 차이가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단락을 썼음 - dc App
무언가를 바꾸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몰입하고 배우는 방식으로 변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음. '사실'보단 '재미'가 중요해졌고, 가르침보단 습득이 중요해졌음. 괜히 최근 독자들이 '교조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는 게 아님 - dc App
그렇다면 관점의 차이로 여겨도 될까? 독자와 콘텐츠 사이의 관계가 급변한 건 인정하는데 나는 여전히 예술이라는 건 작가의 지위가 더 높고 그게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저번에 누가 최근 한국 소설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글 뿐이라 얘기한 적 있는데, 이것도 하나의 현상이라 봐야할 듯. 독자가 모르는 내용을 얻어가는 게 아니라, 아는 내용을 그럴듯하게 편집한단 소리니까 - dc App
관점의 차이지. 소설에 명백한 진리가 어딨겠어. 다만 디지털이 보편화되며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가 늘고 있다는 경향성이 보인다는 얘기일 뿐임. 문학성/대중성을 어떻게 나눠야할진 나도 잘 모르겠고. - dc App
아도르노와 베냐민의 미학을 최근에 겉핥기로나마 공부했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베냐민보단 아도르노가 정확하게 예상한 것 같아. 생산자/수용자 경계의 무화도 그렇고, 여러 경향들이 굉장히 정신분산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나는 이게 부정적이라고 봄. 베냐민은 몰입이 아닌 정신분산을 통해 예술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비판적 거리두기가 가능해질 거라고 보는데 나는 이게 자본주의사회의 성격을 간과하고 예술의 수용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한 예측으로 보이더라고.
베냐민이 기대한 것 같은,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다수의 군중이 아니라 여전히 엘리트-예술가인 게 아이러니인 거 같음. 예컨대 정지돈 같은 사람들은 분명 기술복제시대의 수혜자일 거임. 베냐민이 기대한 미래의 독자일 거고. 근데 대중들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비판적 거리두기는커녕 소비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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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입장인지는 알겠음. 다만 나는 저런 류의 이야기는 적확한 문예비평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문단이라는 시스템과 일반 대중 사이의 상호작용을 뭉뚱그려서 비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
첫 인용문부터 헛다리 짚어서 그냥 쭉 내렸음. '자기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 국문학을 안 읽는 게 아님. 너무 '자기 얘기' 같아서 안 읽는 거임. 나루토가 서양인들의 유년기를 다뤄서 흥행했냐? 대한민국 누구나 게임으로 현실 능력치를 올려본 적 있어서 웹소설 시장이 커졌음?
내가 쓴 글도 비슷한 취지임. 다만, 잘팔리는 소설이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만 있는 건 아니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길게 풀어 써놓은 거임 ㅇㅇ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