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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갇힌 한국 작가들

다시 백지은의 비평으로 돌아오자. “이 시대 한국 문학에 독자들이 냉담한 것은 재현장치로서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실제 문제는 여전히 문학을 재현장치로 파악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 재현장치란 표현 이면엔 현실과 문학을 구분하고, 문학을 현실의 모방으로 보는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 이 구분이 문제의 핵심이다.

비평가 권영민은 그의 저서 문학사와 문학비평에서 한국 문학은 순수와 참여의 이분법 위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문학이 현실을 말해야한다는 참여주의와 문학과 현실을 분리해야 한다는 순수주의 사이 대립은 현대에 오면 가상/실재의 이분적 대립으로 변화한다. “작품과 작품의 기반이 되는 역사와 사회를 분리시키려는 시도. 그러나 작품과 세계, 이 두 가지가 흔히 생각하는 듯 명확히 분리될 수 있는가?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던 니체의 말을 기억하자.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튜닝, 프루닝 과정을 거친 뇌의 해석에 해당한다.” 디지털 시대, 가상과 현실은 우리 생각만큼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다. 문학 내부가 가상인 만큼이나, 문학 외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역시 허구적이다. 훌륭한 작품은 독자적인 가상을 내부에 형성하면서 동시에 외부의 현실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깨닫게 한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지 외형이 바뀌었을 뿐이다. 참여 문학은 재현과 참여로, 순수 문학은 이젠 장르 문학과 실험 소설로 그 탈을 바꿔 썼다. 그러나 그 기저엔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이 존재한다. 이 이분법 탓에 작품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현실과 소통하는 가상을 획득하지 못한다. 대신 현실에 복종하거나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결과만을 내놓는다.

한강은 재현에 천착하는 작가의 대표격이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노랑무늬영원, 작별하지 않는다등 한강 소설은 개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속삭여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실 입구 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거슬렸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 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에게 소설은 현실의 고통을 재현함으로써 사회의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도구이다. 그녀의 세계에서 사회는 고통으로 가득 찬 곳, 끊임없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장소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설은 누구보다도 비폭력을 원하지만, 동시에 결국 폭력을 피할 장소 따윈 없다는 체념을 깔고 간다.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중략)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 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훈자)

훈자는 속세에서 가장 먼 공간이다. 자본 권력이 손닿지 못했고, 인종 사이의 차별도 존재치 않는다. 노랑무늬 영원수록작 훈자에서 주인공은 훈자에 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진다. 그러나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훈자 역시 권력의 편입을 막지 못한다.

작은 규모지만 깨끗한 호텔들이 들어섰고, 차츰 늘어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밤 치안이 예전 같지 않아, 혼자서 골목길을 산책하다 가진 것 모두를 털린 여행자도 있다고 했다.”(‘훈자)

어떻게 해도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산다. 이는 역설적으로 누구든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순 없다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기록들이 잠깐씩 삽입되었을 뿐 내러티브가 끊기거나, “말 사이 침묵을 삽입하는 등의 기법은 재현 불가능, 소통 불가능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재현하기 위한 시도이다이렇듯 한강의 글은 굉장히 아름답지만 군데군데 비어 현실에 독립적인 가상을 확립하지 못한다. 독자는 현실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현실감을 그녀의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한강의 글은 소설보단 오히려 시에 가깝고, 21세기보단 20세기에, 디지털보단 아날로그에 더 가깝다.

한편으로 어떤 소설은 단순히 현실의 재현을 넘어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자 한다. 현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참여 문학은 현실 이상의 가상을 조직하려는 현대적인 시도로 봐야한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그러한 참여(계몽) 소설의 대표 주자이다. 소설은 82년생 여성의 일생과 그녀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끈덕지게 보여준다. 세밀한 감정 묘사와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억압은 일견 투명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다수의 독자가 핍진하게 짜여진 작품의 서사에 어떤 현실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 리얼에 가깝다. 그러나 작품은 끝내 현실을 넘어서진 못한다. 주인공 억압받는 여성을 제외한 기타 남성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서사는 맞지 않는 삽화를 억지로 기운 느낌을 준다. 작위적인 인물과 서사 탓에 소설은 내적으로 자체적 현실을 이루지 못하고 외부 세계에 의존해야 한다. 작품 중간중간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겠지.

“50개 대기업 인사 담당자 설문 조사에서는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남녀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남성 임금을 100만원으로 봤을 때 OECD 평균 여성 임금은 844천원이고 한국의 여성 임금은 633천원이다.”(조남주, 82년생 김지영)

픽션의 이야기에 현실의 통계를 엮어 현실감을 주려는 시도. 그러나 픽션에 현실을 끌고 오려는 꼴이 되려 우스워 보이는 건 왜인가. “소설 속의 인물은 현실의 삶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그의 저서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의 서문에 남긴 말이다.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는 페루 군부에서 실제로 운용했던 특별봉사대에 관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현실을 가장하지도 참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끝까지 문학적 유머와 상상력을 관철한다. 그 덕에 소설은 독특한 가상 공간을 확보하고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를 새로이 해석할 발판을 마련해준다. 소설이 현실에 기대는 순간 픽션은 현실의 열화 복제로 남는다. 82년생 김지영을 다 읽은 끝에 느끼는 묘한 불쾌함은 단순히 메시지나 내용에서 오는 게 아니다. 정확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소설의 입체성을 없애버린 그 작위성에서 온다. 현실의 불완전한 모방에서 느끼는 섬뜩함, 사람과 엇비슷하게 닮은 로봇에게서 느끼는 언캐니uncanny에 가깝다.

김초엽을 필두로 한 한국 SF(K-SF) 문학은 문학만의 가상을 창조하려 한다는 점에서 순수 문학의 계승으로 봐야한다. 새로 등장한 배경과 사건을 처음 접한 독자는 참신함을 느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어라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실망하고 만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현실과 가상 사이의 이분적 구도에 존재한다. 잠시 김초엽 작가의 인지 공간을 살펴보자. 인지 공간은 공동체의 사고를 마치 한 개체가 하는 것처럼 하나로 이어주는 도구이다. 인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간 쌓아온 지식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개인을 넘어서는 사고를 하게 된다. 이브는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지공간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곧 공동체를 떠나고 인지공간에서 잊혀진다. 이브가 잊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인공 제나는 공동체에게 중요치 않은 사건들이 인지 공간에서 쉬이 잊혀지고 수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제나는 이러한 인지 공간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반기를 든다.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전체주의에 대한 반기. 바로 이 지점에 문제가 자리한다. 인지 공간이란 새로운 배경에 비해 그 속을 움직이는 인물의 문제의식과 사고방식은 (2020년 현실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너무도 구시대적이다. 인물과 배경의 괴리는 작품 내부 논리의 붕괴, 이윽고 가상의 붕괴로 이어진다. 같은 단편이지만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약관화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딸아이를 잃은 언어학자이다. 당연히 신파로 빠질 것 같은 설정이지만, 테드 창은 지구에 외계인이 도착한다는 SF적인 설정을 가미해 소설의 성격을 180도 뒤집는다. 그녀는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의 언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구성돼있다. 과거와 미래를 이미 쓰여진 책을 보는 듯 바라보는 사고방식. 그녀의 사고 역시 외계인의 언어를 학습해가며 변화한다. 끝에 가서 그녀는 딸아이에게 슬픔이나 그리움을 느끼지 않는다. 외계인의 사고방식에서 딸아이의 죽음은 이미 쓰여진 소설처럼 바꿀 수 없으며, 한편으론 소설을 읽듯 과거의 딸아이를 언제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선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그러나 오히려 외부 현실과 괴리된 캐릭터는 외계인에 대한 치밀한 설정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소설의 가상에 철저히 몰입하게 만든다. 이처럼 작품의 논리를 세밀하게 설계해 가상을 마치 현실처럼 설득시키는 힘이 현재 한국 SF엔 부족하다.

현실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 비단 독자만이 아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김사과를 필두로 한 실험 작가군이 여기에 포함된다. 김사과는 분열적인 화자를 작품 표면에 내세워 현실을 조각내고 부순다. 캐릭터들은 대체로 주어진 현실에 반항한다. 인물의 사고, 묘사와 서술은 자꾸 모순된다. 김사과의 작품 대다수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이는 모두 주어진 현실을 부수려는 시도로 봐야한다. 그러나 김사과의 소설은 이미지를 부술 뿐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깨진 이미지는 독자가 몰입할만한 가상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구 부수고 이해하지 못할 단상을 이어붙이는 행위는 20세기에나 유행했던 콜라주 기법을 연상시킬 뿐이다. 김사과 소설에서 어딘지 낡은 냄새를 맡았다면 이렇듯 현실을 깨부숴야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구시대적 태도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 문학에 지친 독자들은 옛 문학으로 회귀하고 만다. 둘 다 현실 재현에 주안을 두는 건 똑같지만, 이미 30년에 가까운 벽을 둔 옛 소설은 더 이상 독자에겐 현실로 다가오지 못하고 미흡하나마 어떤 가상적인 느낌을 준다. 이청준이 그린 소록도, 김승옥이 그린 무진, 이문구가 그린 관촌 모두 당대엔 지극한 현실이었으나 오늘날엔 그런 현실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소설을 읽으며 우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느낀다. 이처럼 현대 한국의 작품 역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평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근래 한국 소설이 대중에게 수용되기 위해선 다시 30년이 필요하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때까지 한국 독자층이 유지될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