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이달 초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읽고
노벨상까지 탄 작가양반이 글이 뭐 이래? 걍 썰 모음집 아닌가…?
하고 뭔가 기웃거려서 그나마 이 양반 최신작인 세컨드 핸드 타임까지 읽고 평가해보려고 했음
읽고 나니까 뭐 그냥 힙스터픽이니 할당제니 뭐니 하는 소리를 넘어서, 저마다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들을 풀어내려는 시도를 수십년간 한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지 않나 싶더라...
장르만 놓고보면 픽션보단 논픽션인데, 보통 논픽션에서 나타나는 최소한의 자기 의견도 없이, 알렉시예비치는 그냥 인터뷰이의 이야기만 계속 들어주고, 그걸 가능한 한 거의 그대로 글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게 느껴짐.
그래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처럼 딱 특정 사건의 불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쓴 것들이 “그래서 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근데 세컨드 핸드 타임까지 읽으니까, 이제야 이 작가가 뭔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알겠더라. 그동안 나온 작품들은 전부 이 세컨드 핸드 타임의 완성을 위한 재료였던 것 같음.
세컨드 핸드 타임에서는 단순히 ‘소련의 해체’를 소재로 그 후 ‘소련이 없는 소련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 그리고 이야기를 담는 과정에서 초반에는 8월 쿠데타나 옐친의 이야기가 나오고, 고르비가 개새끼네 스파이네 뭐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 그것들을 넘어서 나오는 건 소련 해체 이전 자유로운 노농 인민의 연합이던 ‘소련’ 체제에서, 소련인으로서 교육을 받고, 민족주의가 대두되지 않았을 시점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더라고. 모스크바의 지하철 테러 피해자의 모녀의 인터뷰를 받아내면서 소련 해체 이후 체첸과 러시아의 민족주의 간 충돌이 왜 이런 테러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아제르바이잔에서 모스크바로 피난을 온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충돌이, 압하지아 여자의 이야기에선 조지아인과 압하지아인의 갈등 등등..
그래서 결국 소련 해체 이후에도 사람들은 소련을 그리워하거나, 위대한 러시아를 개씹창으로 만든 고르비와 옐친을 욕하고, 소련인이 너무 순수했기에 당했다고 말하지.
작가는 의도한 배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련 체제를 그리워했던, 혹은 좋게 보는 사람의 말과 공산주의 체제를 부정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교차했음.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던 사람과 8월 쿠데타때 옐친을 따라 붉은 광장으로 나온 사람,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간 사람들과 러시아에 남아있을 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나만 그런건진 모르겠음. 근데 나는 여기서 작가가 뭔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더라고.
그렇게 순진했던 소련인들의 선택이 바로 지금의 현실이라는 점, 그리고 이 현실을 만들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 말고를 할 게 전혀 아니라는 것.
CIA의 공작이라고, 올리가르히가 어머니 조국을 팔아먹었다고, 옐친과 푸틴 때문이라고 말해봤자 결국 그 과정은 소련인, 러시아인의 손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잖아. 근데 소련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은근슬쩍 자기는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려 하지. 소련 시절엔 이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옐친이 다 말아먹었다면서.
알렉시예비치가 그동안 쓴 작품들은 다 돌아보면 결국 저 얘기를 하려는 것 같음.
전쟁의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나온 참전용사가 지킨 나라를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나온 방사능 낙진을 목숨걸고 치워 지킨 나라를
아연 소년들에서 나왔던 아프가니스탄에 고귀한 공산주의의 이념을 전파하는 그 나라를
세컨드 핸드 타임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부숴버리고는, 그것을 애써 부정하려 하는 사람들과, 그 이후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
오늘도 술독중이라 횡설수설같은데, 그냥 저 작가 작품들을 몇 개 읽어보니까 일개 썰들을 하나하나 묶어서 저런 주장을 하게 만든다는 것과, 그걸 하기 위해 들인 노력들을 감안해보면 충분히 노벨상 탈만하지 않았나 싶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