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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이전에 썼던 페미니즘 비판 글 링크


세 줄 요약


1. 설겆이론은 페미니즘과 메커니즘이 거의 동일하다. 문제의 핵심은 특정 성별이 아니다.

2. 문제의 핵심은 과도하게 물화된 인간상과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권력에 있다.

3. 인간이란 무엇인가, 일견 젠더 갈등과 아무 관계 없어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돼야 갈등은 해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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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겆이론은 틀렸다 - 소립자로 바라보는 설겆이론 비판


- 최근 설겆이이 유행하고 있다. “연애경험이 없거나 적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젊은 시절 성적으로 문란하게 놀았던 상대방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것을 마치 음식은 남이 먹고 자신은 그저 다 먹고 더러워진 그릇을 설겆이만 한다는 것에 비유하여 낮잡아 이르는 담론”. 글쎄,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이야길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은 페미니즘담론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그것과 굉장히 비슷했다. 특정 성별을 그룹화해 마치 자신이 피해자고 상대역이 가해자인 양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그 기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치 자신이 진리고 정답이라는 듯 우기는 그 웃기는 태도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난 글을 읽으며 어떤 고약한 악취를 맡았다. 설겆이를 할 때면 나는 주방세제의 비린내 같은.

- 난 일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글로 여성혐오를 혐오하다란 책을 분석한 적이 있다. “우에노 지즈코의 페미니즘은 여성 혐오 개념을 통해 남성 혐오를 수행한다.” , 페미니즘은 여성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혐오를 양산한다. 이 글에서 난 혐오는 어떤 성별이 다른 성별에게 일방적으로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은 쌍방향적으로 일어나기에 지즈코처럼 남성만을 비난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다. , 이 때 혐오는 일반적 용례로써의 혐오가 아니라, 상대를 인간이 아닌 사물로 파악하는 것 -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자가 아닌 즉자로 바라보는 타자화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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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겆이은 놀랄 정도로 지즈코의 페미니즘과 닮아있다. 1. 여성 일반이 남성 배우자를 인간이 아닌 물건(지갑)으로 바라본다. 2. 남성은 피해자고, 여성은 가해자다. 성별만 바뀌었지 주장은 대동소이하다. 난 이 주장 자체를 반박할 생각은 없다. “여성 역시 혐오를 수행한다”, 이미 이전에 한 이야기니까. 내가 궁금한 건, 하나의 사회를 두고 같은 방식으로 분석을 했는데도 전혀 다른 두 개의 담론, 여성이 가해자다, 혹은 남성이 가해자다 하는 담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냐는 부분이다. 두 분석 모두 핵심부분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건 바로 그 엇갈림 탓이었다.

-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1960-70년대 프랑스의 젠더 갈등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출간된 즉시 프랑스 문단에 파장을 일으켰고, 우엘벡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줬다. 한국이 현재 앓고 있는 병증을, 프랑스는 이미 40년 전에 경험했다. 문학 텍스트는 사회의 반영이고, 담론을 파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언표이다. 문학 텍스트 속엔 현재 사회의 그림자가 담겨있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증은 무엇인가, 이 글에선 소립자에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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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은 여성/남성이 아니다. 핵심은 과도하게 인간이 물질화 됐다는 점에 있다. 물질화는 투쟁 영역의 확장, 즉 권력이 인간 관계 깊숙이 침투했기에 일어난다. 소설을 살펴보며 자세히 논해보자.

- 소립자는 미셸 제르진스키와 브뤼노 클레망, 두 이부 형제에 관한 소설이다. 브뤼노는 어릴 적 성적 소외를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이성에게 인정받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성을 갈망한다. 그는 주기적으로 성매매를 한다. 섹스하기 위해 중년의 나이까지 헬스를 한다. 그가 경험하는 1970년대 프랑스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잃었다. 종교나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종교의 위치는 섹스가 대신한다. ‘성의 해방’, ‘성적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된 인간이다’, 사회엔 그런 인식이 팽배하다. 브뤼노는 그런 사회에 철저히 순응한다.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여자를 사귀고 섹스를 한다. 그러나 육체가 노쇠할수록 여자를 접할 기회는 줄고, 콤플렉스에 빠지게 된다. 그는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 미셸은 물리학자로서 한 발짝 떨어져 사회를 관망한다. 소립자는 다른 입자와의 상호작용이 없으면 그 위치가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입자는 외부의 중력장, 전기장에 영향을 받고 그 때 비로소 하나의 입자로 확정된다. 그런 장의 작용이 없으면 소립자는 하나의 입자로 결정되지 못한다. 미셸은 그런 소립자의 미시 운동을 인간 사회에 겹쳐 바라본다. 인간은 다른 입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인간으로 확정될 수 있다. 사회의 호명이 없으면 인간은 주체로 확정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회가 규정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의 시선에서 1970년대 프랑스는 자유라는 허구적인 개념으로 오히려 개인의 삶을 억압한다. ‘네가 원하는 만큼 성적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명제는 성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 네 자신의 성기를, 외모를 갈고 닦아라는 명제로, ‘타인보다 네 성기가 크다는 사실을 증명해라는 명제로 바뀐다. 인간은 외부 사회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재밌는 부분은, 그런 미셸 제르진스키의 목소리가 작가 미셸 우엘벡에게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엘벡은 하나의 인물을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계보를 파악하는 통시적 방식으로 묘사한다. 한편 작중 인물이 사건을 겪을 때면 과도할 정도로 주변 인물을 설명한다. 하나의 인물을 설정하기 위해 그와 상호작용하는 주변 인물을 포석하는 방식, 우엘벡은 그런 방식으로 소설 세계를 구성한다. 잠시 우엘벡의 다른 소설을 살펴보자. 우엘벡은 소립자를 출판하기 이전에 투쟁 영역의 확장이란 소설을 내놓았다. 그가 파악하는 사회는 오로지 투쟁의 세계다. 19세기까지 경제, 정치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졌던 투쟁은 이제 성과 사랑 등 개인적인 영역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권력은 개인의 영역까지 깊게 침투했다. 경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 성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 모두 도태된 인간, 사회에 필요 없는 낙오자로 취급당한다. 그의 인식은 소립자에도 이어진다. 브뤼노는 그의 성기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성기 성형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자신의 성기 크기가 새로운 콤플렉스가 된다. “매체가 욕망하는 것만 욕망한다는 보드리야르의 통찰을 기억하자. 소설 속 인물들은, 잡지, TV, 전단에 등장하는 광고를 바라보며 원래는 없었던 성적 욕망을 본능으로 생각하게 된다. 19세기까진 온건했던 사회가 20세기 매체의 발달과 함께 끊임없는 투쟁의 장으로 변한다.

- 생활 내부에 권력이 침투했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생명정치권력개념을 주창한다. 이제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도 관리되고, 싸우고, 쟁취해야하는 대상이 됐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다시 설겆이론으로 돌아오자. 설겆이론의 핵심은 여성 일반이 남성을 애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개인 관계에서 인정의 부재. 이 지점에서 남성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시당했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설겆이론은 인정을 쟁취하기 위한 인정 투쟁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애시당초 인정이란 무엇인가. ‘인정이란 개인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포옹하는 인간적인개념이 아니었던가. 개인의 성격을 해체하고, 관리하고, 끊임없이 계발해야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정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성욕과 사회적 안정을 제외한 사랑을 얘기하는 건 인간은 생산 수단에 불과하다는 자본주의의 핵심 명제를 부정하는 꼴이다.

-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설겆이론의 핵심에 '처녀'가 존재하는 이유다. 현재 설겆이론에서 남성이 원하는 건 단순히 섹스가 아니다. 그보단 개인적인 '인정', 인간적인 사랑에 가깝다. 그렇기에 창녀보단 돈으로 살 수 없는 성녀, 물질적인 것 이상의 사랑을 주는 처녀를 요구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신봉자들은 '인정'이란 비물질적 관계를 시인할 순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꾸 '처녀'를 논하는 건 '내가 원하는 건 처녀지 인정이 아니야' 하는 식의 실제 욕구를 외면하는 행위에 가깝다.

- 우습게도 설겆이론은 여성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여성에게 무언갈 요구하지 않는다. 철저히 경제적인 여성의 선택을 비난하는 건 자본주의와 경쟁 제도 자체를 비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옹호하고 싶고, 결혼 제도는 비판하고 싶고... 그 끝에 있는 건 자조 섞인 비혼주의. “설겆이론에 부들대는 집단은 딱 2종류다. 짜장면 그릇과 퐁1퐁1단. 처녀와 찐따는 부들댈 필요가 없다는 얼핏 해보이는 반응엔, ‘나도 너도 다 병신이다. 노력은 의미가 없다. 진짜 숭배해야하는 대상은 선천적으로 외모가 잘생기게 태어나 아무하고나 섹스하고 다니는 인싸들이다. 최소한 이 사실을 아는 나는 너보단 덜 병신이다하는 식의 중2병스러운 태도가 숨겨져 있다. 꼭 재벌을 옹호하는 기본소득자들처럼 말이다. 그 기저엔 철저한 열등감, 배금주의와 육체 숭배, 그 밖에 다른 삶엔 아무 의미가 없다는 현대적 허무주의가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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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우엘벡은 소립자말미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성별을 없애버린다. 그래놓고는 이것이 새로운 유토피아다’, 는 식의 결말을 낸다. 이 결말을 실제로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변화할 거란 통찰로 봐선 안 된다. 오히려 유전자를 조작하는 정도로 환골탈태하지 않고선 인간은 영원히 이 모양 이 꼴일 것이다, 그런 지독한 반어에 가깝다.

- 나도, 고질적인 젠더 갈등에 이렇다 할 해답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시대의 흐름이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대두되며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급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다. 앞서 말한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 - ‘인간은 생산 수단에 불과하다가 기계의 등장으로 흔들리고 있다. 인간 관계가 새로이 정립될 때 젠더 갈등 역시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우스꽝스러운 페미니즘이나 설겆이론에 동조하지 말라는 이야길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