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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굉장히 술술 읽혔다.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후로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고전이었다. 물론 번역이 난잡하거나(출판사에 따라 다름) 오글거리는 문체에 거부감이 있다면 그리 추천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가 스스로를 천재라 자칭할 정도로 나르시즘적 면모가 있고 유미주의의 전도사라 불리며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장된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안 읽어본 사람에게 이 글을 추천할 것이다. 작품의 심오함을 떠나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고 그 후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우선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 왕실 아카데미 회원이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열정적인 민족주의 운동가이며 예술을 중시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예술에 관심이 컸고 명문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로 기본적인 머리도 출중했다. 거기다 외모도 잘생겼고 웅변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시대의 엄친아였다.
이토록 가만히 냅둬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지만 본인도 가만히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학업 과정을 거치며 유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존 러스킨과 호레이쇼 페이터의 문예예술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후에 유미주의에 푹 빠진 와일드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으로 이주하는데 거기서 본인 특유의 파격적인 패션 센스와 냉소적이면서 재기 넘치는 화술로 단숨에 이목을 끌었다. 와일드가 활발히 활동을 계시한 것도 이즘해에 일이었다.
1880년부터 그는 몇 권의 책을 출간하고 1882부터는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유미주의에 대한 강연을 열었다. 특히 강연을 위해 미국으로 향할 때 뭐 신고할 물건이 없냐는 세관원의 질문에 이런 대답을 남겼다.
"내가 신고할 건 내 천재성밖에 없소."
이처럼 오스카 와일드는 스스로의 천재성에 확신하고 거침없는 예술가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마냥 잘 풀렸던 것도 아니었다. 우선 이렇게 저널리즘과 강연 활동에 눈을 돌린 시점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상당히 소원했고 관계가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후에 올 와일드의 전성기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가족'에 대해 냉소적이면서도 다소 씁쓸함이 묻어난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스스로도 꽤 오랫동안 켕기긴 했던 것 같다. 물론 이건 나중에 아내와의 이혼으로 청산하게 되지만.
얘기를 다시 돌려서 와일드는 강연 활동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유미주의를 위한 작품을 써내려갔다. 이제까지 많은 시, 희곡, 비평을 쓰긴 했으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1887년부터 시작됐다. 이때 그의 대표작 중에는 <캔터빌의 유령>, <아서 새빌 경의 범죄>, <행복한 왕자>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와일드의 최초이자 유일한 장편 소설이었으나 '오글거린다' '표현이 부담스럽다'라는 등의 이유로 대중에게 그리 좋은 소리는 못 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와일드는 이후에 소설은 쓰지 않고 <살로메>,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보잘것없는 여인>과 같은 희곡만을 썼다. 실제로 과거에도 현대에도 와일드는 희곡쪽이 더 높게 평가받는다. 그 중에서 <살로메>는 유미주의 절정이라고 칭송받기까지 하고. 이 외에도 와일드는 <이상적인 남편>,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과 같은 명작들을 써내며 문학가로서의 절정기에 이르고 단숨에 엄청난 명성을 얻는다.
순탄할 것 같았던 와일드의 인생은 단숨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1895년, 그의 희곡 <살로메>를 번역해준 앨프레드 더글라스 경과의 동성애로 고발당했던 것이다. 신고자는 그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이었다. 19세기에는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에 와일드는 중노동형 2년을 선고받는다. 사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라는 주장은 그 당시에도 심심찮게 나오곤 했었다. 특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만 봐도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를 중심으로 헨리 워튼, 바질 홀워드가 보내는 뜨거운 시선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와일드가 심증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더글라스와 동성애자 관계였는지, 그냥 친한 친구 사이였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다. 또한 와일드의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와일드는 비록 가족에게 소원하긴 했지만 애정이 있었고 특히 자식들을 아꼈기 때문에 불행에 또다른 불행이 겹친 것이었다. 작품이라 하긴 뭐하지만 이 때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모아놓은 것이 그 유명한 <옥중기>다. 이 글을 보면 그 당시의 와일드가 얼마나 비참한 신세였는지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와일드는 바로 프랑스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와일드는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으며 지원받은 돈을 몽땅 술을 사는데 쓰고 돈이 떨어지면 빌붙고 구걸하면서 삶을 이어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레딩 감옥의 노래>라는 시를 발표해 재기를 노리지만, 결국 1900년 파리의 호텔에서 뇌수막염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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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져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쓴다. 내일에 본겨적으로 소설 후기 씀. 참고로 문예출판사 번역본으로 읽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기가 막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