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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의 국왕 중 세종과 더불어 학문적 성취가 가장 뛰어났던 왕이다. 본인 자신의 역량도 뛰어났지만, 부친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자신을 노리는 정후겸, 홍인한 등의 세력으로부터 본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상당한 성리학 이해 수준을 보인 정조는 세손 시절에도 성리학 서적을 저술하였으며, 영조 말년에는 대리청정을 통해 정치 감각을 키웠다.
홍인한과 정후겸 그리고 자신의 측근이었으나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변한 홍국영을 제거한 정조는 본인이 군주이자 스승이라는 군사 를 자부하며 여러 학술정책을 펼쳤다. 규장각을 활성화해 규장각 각신들과 함께 각종 주자학 서적의 간행에 힘쓰거나 초계문신, 성균관, 지방의 유생까지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의 성리학 연구 수준을 끌어올렸다.
정조는 단순히 문예부흥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능행을 통해 백성들과 만나고, 암행어사의 파견과 지방관 감찰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물론 정조 대에도 여전히 민은 교화의 대상이자 지배층에 종속된 존재였으나 정조는 지방ㅇ유생을 통해 민을 교화하고자 지방 교육기관에 여러 종류의 서적을 비치시켰으며, 윤음을 언해하여 반포하였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켜, 본인의 권위 강화에 이용하였다. 영조가 신임의리를 긴 기간에 걸쳐 공인한 것처럼, 정조도 임오의리를 오랜 시간에 걸쳐 공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인 채제공을 정승으로 삼아 노.소 남인의 3당 견제 체제를 완성하였으며, 노론 산림과 영남 남인을 동시에 우대하며 붕당 간 균형을 맞췄다.
정조는 자신의 통치가 신료와 백성 등 모두에게 미치기를 원했고, 끝없는 수신으로 이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회고나 저자인 김문식의 지적처럼 이러한 전 과정은 엄청난 격무를 수반했으며, 정조만큼의 학문적 자신감과 능력이 없으면 후대 왕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결국 정조가 보여준 군사로서의 면모는 아들 순조에게 이어지지 못한 채 정조의 정치는 정조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했던 척신정치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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