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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은 총을 뽑아 쏘는 것과 같다. 작가가 무엇을 쏘려 했는지는 알겠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무엇을 위해’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다친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새에게 물과 먹이를 주기 위해 떠난다. 그곳에서 제주 4.3사건의 피해자인, ‘인선’의 어머니와 관련된 자료를 보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쏘았는지는 알겠다. 이런 소설이 적지도 않고. 당장 ‘톰 아저씨의 오두막’처럼 사회 문제, 혹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삼아 쓴 작품이 적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작가는 이걸 ‘왜’ 썼는가?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글을 쓰겠다고 나서는 모든 젊은이에게 ‘당신은 무슨 할말이 있는가?’라는 원칙적인 질문을 버릇처럼 제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질문은 요컨대 ‘남에게 전달할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미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가. 공감? 위로? 관심? 그저 여기에 머무르기를 원했다면, 작가가 책을 쓰는 데 들인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사르트르는 여기서 작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더 던지기를 원한다.
‘당신은 세계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당신은 그 드러냄을 통해서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가?’
전자는 충분이 이해할 수 있다. 12년 넘게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건도 아니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이것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는 보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떤 변화를 원하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나는 의문을 느낀다. 어떤 변화를 원하는 걸까. 정말 이 사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해서, 이 사건의 피해자를 알리기 위해서라는 말인가? 언제부터 작가가 기자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가. 작가라고 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마치 ‘선구자’와 같은 역할 아니였는가? 지금에 이르러 내가 너무나 큰 기대를 하고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가 이 책을 이해하기에 모자를지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왜 이토록 추앙받겠는가. 하나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왜 문학사에 새겨졌겠는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장르가 물론 즐기기 위한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아픈 곳을 알려주는 청진기로 남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디 의사가 환자에게 공감만을 제공하겠는가. 치료를 위해 있는 사람이.
글쎄... 저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설가마저 방향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건 동의하기 힘든데... 물론 뻔한 관점으로 뻔한 소재를 가지고 뻔한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소설일테지만... 뭔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혹은 잘 알려진 사건이라도 잘 보여주지 못했던 관점과 층위에서 소설로서 재구성해낸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소설이 아닐까? 거기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생각해보는 건 독자의 몫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내가 저 책을 읽지 않아서 저 책이 가치/의미 있다 없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님
난 작별하지 않는다 너무 좋았음. 4.3에 대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슬픔과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하거든. 거기다 인선의 어머니가 평생을 두고 남편의 유골을 찾으려 했다는 점과 가족에 대한 사랑도 너무나 마음깊이 와 닿았음. 인선의 손가락을 지르는 아픔이 4.3 피해자들의 아픔과 치환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강도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으면 한다고 했는데 그 말도 너무 공감이 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