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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어찰첩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들의 모음집이다. 흔히 심환지는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고, 신유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의 핵심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조어찰첩이 2009년 발견되면서 정조가 심환지를 중요한 측근으로서 인정하고, 그를 이용해 정조 말 정국을 풀어나가려했음이 밝혀졌다. 


기실 정조대의 정치사는 의리론 시비로 볼 수 있다. 영조의 신임의리와 정조의 임오의리 등을 놓고, 각 당파는 서로 우위를 점하고자 했으며, 정조는 그러한 의리론의 대립을 이용해 왕권강화와 탕평책을 시행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추숭을 집권기 내내 자신의 정치적 목표롤 삼았으나 임오의리에 대해 성급히 접근하지 않았다. 


본인을 영조와 효장세자의 적통을 이은 존재로 자부하며 노론의 신임의리를 인정하였고,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김종수를 측근으로 삼아 남인 채제공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찰은 각종 정치 현안을 비밀리에 상의하고 당파 간 조정을 위한 정조의 히든카드였다. 정조는 어찰을 통해 상소문의 내용 등을 정해주고, 심환지의 출처에 관해서도 정해주었다. 발견된 어찰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것들이지만, 연구자들은 심환지 외에도 정조와 어찰을 통해 의견을 조율한 신하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정조는 당파 간 갈등을 조정하고, 임오의리의 관철을 위해 막후에서 신하들을 조종했으며, 이를 통해 본인의 정치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늘 반대파들의 위협에 직면했기 때문에 반대파들에 대한 조정에 대해 늘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그 결과 임오의리의 관철에 성공했다. 물론 1804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 살며 부친의 추숭을 완료하겠다는 갑자년 구상은 정조의 사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정조의 이러한 신중 행보는 영조 말년 이후 사분오열 되어있던 각 정파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정조의 구상과 탕평 정국은 정조 사후 신유박해와 뒤를 이은 시파 세력의 벽파 축출로 끝을 맞았지만, 정조는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즉위하여 24년 동안 천천히, 본인이 구상한 것들을 이루어나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주자학 발전를 위한 방대한 학술 정책을 펼치고, 백성의 언로를 열고, 민의 생활에 늘 관심을 기울였으며, 재정 문제에 괂해서도 내수사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등 늘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지런함과  정무 능력은 정조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군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자 대중들에게도 세종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군주로 인식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