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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박정희 정치의 특징은 '친위 정보기구를 통한 정치 인멸'이었다. 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구, 행정 체계 및 돈을 총동원해 선거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공작으로 정치 타협의 룰을 훼손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여당 정치인은 힘에만 빌붙고 야당 정치인은 돈과 공작에 놀아나는 천박한 존재로 굴러 떨어졌다." - p 699


벽돌 읽는 건 간만이어서 발동은 느리게 걸렸는데 중반쯤 읽으면 속도가 확 붙는 묘한 책임. 5.16부터 12.12까지 3 ~ 4공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특이하게 전두환이 맨 앞과 맨 뒤를 장식하는 수미상관 구조가 특이했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현대사 서적계의 《안나 카레니나》라고나 할까.

저자가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박정희 시대가 사실상 '정치행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박정희와 수하들은 민주국가라는 제도적인 틀 바깥의 수단을 동원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지. 돈이나 지위로 포섭하는 게 그나마 '문명화된' 방법이었다면 이 우회로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납치, 테러, 고문 등을 일삼으며 국민-이라고 쓰지만 어쩐지 신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는 느낌이 책 읽는 내내 들더라-에게 박정희가 '임금이며 스승이며 아버지 그 자체인' 체제를 내면화시켰지.


이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양김이 겪게 되는 고초도 여과없이 등장해. 박정희 집권 내내 국내에서 그에게 저항했던 YS는 염산테러와 국회의원 강제 제명, 가택연금을 감수해야 했고, 유신 직전에 치러진 71년 대선에서 대놓고 관권 선거를 자행했음에도 박정희를 턱밑까지 추격한 DJ는 이후 숱한 죽을고비를 넘기고 20여 년 동안 해외와 교도소를 떠돌아야 했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은 박정희의 이런 탈법적인 구상과 정국 운영 방향을 현실에 구현하는 가장 유력한 도구였지.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가장 믿었던 부대가 황제 근위대였다면 박정희가 의지했던 '가장 잘 드는 칼'은 중정이었던 셈이지. 물론 전적으로 중정에만 의지하지 않고 보안사나 경호실 등 별도 정보기관을 통해 정보의 교차 검증을 하긴 했지만 박정희 체제를 떠받들고 있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중정이었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사를 알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야. 치킨 레이스 끝에 결국 사이좋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김재규와 차지철이 사실 10.26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는 점이나 김형욱 중정부장의 물불 안 가리는 정권 옹위 행적, 박정희 3선과 7.4 남북공동성명을 물밑에서 견인한 '제갈조조' 이후락 중정부장의 행보 등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거나 막연히 인지하고 있다가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실들이 적지 않아.


이 책을 읽으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들었어. 개인적으로 대통령 재임 시절의 업적은 평가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보지만 쿠데타 모의와 여기에 필요한 병력을 전방에서 빼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이적행위-노태우는 당시 9사단장(백마부대) 이었지-를 저지른 원죄 때문에 다양한 평이 공존하는 인물이지. 그래도 전임자 빡빡이마냥 대놓고 어그로는 안 끌어서 욕도 덜 먹는 대신 존재감이 묻히고 희미해진 감이 있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보다 훨씬 찬반이 격렬하게 갈리고 한끗 빗나가면 바로 정떡으로 비화될 소지가 농후한 게 박정희이라는 인물이지. 난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이 100년에 걸친 외세의 '수탈시대'를 청산하고 기본적인 자본 축적 능력을 갖출 수 있게끔 체질을 바꾸고 초석을 놓았다는 부분  만큼은 그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 다른 방식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 거라고? 글쎄... 역사에서 흥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가정하는 if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만주가 지금도 우리 땅이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사고의 궤 안에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동시에 박정희는 본인이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며, 아니,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다는 망집에 사로잡혀 60 ~ 70년대를 '겨울공화국'으로 만든 거악이기도 해. 특히 집권 말년에 인의 장막에 싸여 저지른 실정이나 권력욕은 좋게 평가해주기 힘들지.


사실 박정희의 평가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어떤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진영논리에서 신자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마냥 절대선도 없고 절대악도 없기 때문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두루 돌아본 후 다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박정희를 '반인반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나 '권력욕과 성욕에 찌든 독재자'라고 딱지 붙여 매도하는 행위는 사실 무의미해. 그보다는 어떤 맥락에서 이런 상반된 세간의 평가가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해보고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지향할 점과 지양할 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따져 보는 게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나는 이 점이 역사학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


다음에 집에서 읽을 벽돌책은 박정희를 비롯해 모든 독재자들의 아이돌이었던 '자유주의 황제' 이자 '코르시카의 흡혈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평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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