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야기

-데미안독후감-

2021 독서갤러리 독서 감상문 대회 문학 부문 

 

데미안을 내가 읽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에도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내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데미안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묘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작품 속 두 주인공인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가 나와 내 친구 관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고 그와 대화할 때 느꼈던 새로운 감정을, 나 역시 그 친구를 만나고 대화할 때 똑같이 느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카인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프란츠 크로머에 대한 싱클레어의 고민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해 준다.

그 친구 역시 초등학교 3~4학년생이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질문들을 나에게 던졌다. 각종 세계사적 사건에 대한 의문점이나 과학적 주제에 관한 것들이 내 친구의 질문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의문점 중 상당수가 허무맹랑한 음모론이거나 과학적으로 조금씩 잘못된 관점일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동안 1차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나에게 그 친구가 던진 물음과 새로운 주제는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친구와 만나기 전까지 나는 책 읽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친구와 만난 뒤로 그 친구의 의문과 그로 인해 파생된 스스로의 의문을 풀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다. 독서의 깊이와 별개로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가능케 해준 것이다. 즉 그 친구는 나에게 지적 호기심을 처음 심어준 것이다.


동시에 이 친구와의 만남과 교류는 나를 점점 새로운 세계로 끌고 들어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1학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우리는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토론에는 사전 준비와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사이의 토론이 이를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시적으로 시작하는 토론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고, 그 친구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경청해야 했다.


나는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새로운 주제를 늘 생각해야 했고,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기기 위한 논리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긴 적은 별로 없지만 이 과정은 나를 더욱 지적인 측면에서 성장시켰다.

친구는 데미안처럼 모든 걸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상 생각의 차원을 넓히려 시도했다. 단순히 폭이 아닌 차원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 친구는 나처럼 책과 다큐멘터리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다.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 채팅 등 어른들이 일반적으로 듣는다면 좋지 않아 보이는것에도 끊임없이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얻어 냈다.


작품 속의 싱클레어처럼 나에게도 방황의 시기가 찾아왔다. 우연치 않게도 친구 역시 나중에 나에게 밝히기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중2~3시절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입시 때문인지 우리 사이는 조금 멀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싱클레어처럼 방황하며 또래 무리에 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즈음 시작된 따돌림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같은 반의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된 따돌림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프란츠 크로머가 중학교 2학년 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나를 구원할 데미안은 오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악몽 같은 기억의 영향은 1년 이상 지속되었고, 나와 그 친구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사이는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나 역시 그 애한테 받은 지적 호기심은 여전했지만 입시라는 벽에 가로막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잊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친구와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나는 문과였고, 그 친구는 이과였기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나 스스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기에 빡빡한 생활과 급우들과의 인간관계에만 내 에너지를 쏟아 부은 점이 더욱 컸다.

그렇게 정신없는 3년을 보낸 결과 나는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그 친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학 생활의 새로움과 자유로움에 심취한 나는 꿈속에서 첫 1학기를 보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 싱클레어가 방황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에도 늘 데미안이라는 존재를 생각했듯이 나 역시 그 전까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그 친구를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그 친구에게 연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친구와 연락을 계속하게 된 뒤로, 내 생각의 폭과 차원은 다시 한 번 넓어졌다. 대학이 자유로움과 다양성의 전당이라고는 하나 수업 내용은 어쩔 수 없이 틀에 박히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내 사고의 폭은 넓어졌지만 차원은 그대로였다.

친구와의 대화, 그리고 토론은 이를 보완해 주었다. 이전처럼 붙어 다닐 수는 없지만 만날 때마다 우리는 몇 시간씩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알을 조금씩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언젠가 내 친구가 나한테 해줬던 말은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했다.

 

네 주장은 어디선가 누군가 하거나 할 것 같은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날 밤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동안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좋은 강의들을 수강해 왔기에 상당히 논리적이고 아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내가 해 왔던 생각들과 그 근거들은 어느 사상가, 어느 교수들의 의견을 종합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기존의 사상들을 종합한다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상을 창조해내거나 획기적인 발명을 위해서는 기존의 결과물들을 참고하고 종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 문제는 기존 의견에 묶여 있었다는 점이다. 사지가 다 구속된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 봐야 얼마 못 움직이는 것처럼 내 생각 역시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여러 편의 논문과 책을 읽고, 권위 있는 교수의 강의를 듣는다 한들, 내 생각이 알 속에 갇혀 있다면 내 생각은 밑으로밖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알 밖에 있는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즉 생각이 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그러지 못했다.

싱클레어 역시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데미안적으로사고해 보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나는 그 틀을 깨고 나오지 못했다.

싱클레어에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은 데미안적 사고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나 역시 피스토리우스와 같은 만남을 했다. 주인공은 바로 내 다른 친구였다. 중학생 시절 서로 동아리를 만들 정도로 친한 친구였지만 그만큼 많이 다투기도 했던 나의 피스토리우스는 고등학교 진학 이후 연락이 끊겼다가 그 친구의 소개로 다시 만났다.


그동안 내 피스토리우스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우리 셋은 다시 친해졌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관계가 더 좋았다. 나의 피스토리우스였던 친구 역시 틀에서 벗어난 채 사고하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의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가 대화하는 것을 보면 놀라웠다. 나 같은 사람은 따라올 수 없는 차원의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쉽게 생각해내지 못하는 비범한 의견들을 내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아주 조금씩 알이 깨지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제 3자가 우리 셋의 대화를 듣는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 심한 사람들은 우리를 4차원 취급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셋의 대화는 여러 관점에서 진행되었고 사소한 것에서조차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이상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나눴다. 물론 이러한 의견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듣는다면 일견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 그리고 내 친구들은 역설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생각의 차원을 넘으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깊게, 그리고 많이 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신호이다. 창의적인 생각이나 차원을 넘는 발상 등은 기존 지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좋은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기존 학설에 영향을 받게 되고 이는 알의 고착화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사고의 차원을 넓힐 수 있었다. 실현 가능성은 우리 셋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여러 각도에서 사고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 서로의 의견에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공유하며, 때로는 전문가들의 서적 등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도 했다.


이러한 차원을 넓히는 사고방식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이 소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던 것처럼 나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과 대화 방법을 다른 친구에게 강요하다가 서로 사이가 틀어져 절교하기도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알을 억지로 부수려 한 것이다.

절교를 겪고 난 뒤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다른 사람의 알을 억지로 부수려 하면 안 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깨달음이다. 데미안에서도 나오듯 알은 세계이다. 다른 사람의 세계를 억지로 부수려 하면 그 반동으로 세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알을 스스로 깨부수도록 도울 뿐이다. 일은 세계이기에 그 세계를 무너뜨린다면 그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반동은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의 데미안, 그리고 피스토리우스는 사고를 확장시키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나를 변화시켰다. 덕분에 나는 큰 반동 없이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알을 깨고 더 높은 차원의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직도 나는 나의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에게 사고의 확장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만큼 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사고의 확장을 가로막는 벽이 몇 겹일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그건 사람마다 강도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단단할 것이다.

아마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도 알을 깨고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싱클레어 역시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알을 깨고 날아오른 것처럼 알을 깨는 데는 무수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와 함께 알을 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결말부의 싱클레어처럼 나 역시 성장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