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부문, 김승옥 <力士> 제목: 당신의 창신동이 있소?

 

큰 길이 동대문과 한양도성을 갈라놓고, 뒤에 솟은 언덕엔 작고 야트막한 집이 빽빽하다. 신호등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6차선 도로, 그 동맥으로 통하는 창신동의 모세혈관 가지가지에는 동대문과 청계천가의 수많은 의류시장으로 옷감을 나르는 오토바이가 혈구 노릇을 한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와 오토바이 소리로 가득한 창신동의 한때 속에도 한켠에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과 늘어지게 잠을 청하는 고양이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창신동은 그래왔다. 언덕 밑 DDP나 평화시장의 활기와 질서와는 확연히 다른 창신동 특유의 활기와 질서가 나를 끌어당긴다. 무질서라는 질서, 불규칙이라는 규칙...


단편 속 (공원에서 대화를 나눈 젊은이)’는 더럽고 비좁은 창신동 하숙집에서 벗어나, 양옥집으로 하숙을 옮긴다.

여섯 시에 기상. 열 시에 할머니와 며느리는 미싱을 돌리고, 열두 시경 라디오 음악, 오후 네 시엔 며느리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게 된다. 여섯 시 반까지는 모든 식구가 집에 와 있어야 하고, 저녁식사 후 십 여 분간 잡담, 그리고 공부. 열 시 오륙분 정도가 되어 식모가 차를 내오면 안녕히 주무십시오를 한 차례 돌린 뒤 수면이라는 숨막히는 규칙 속 일상이 계속되며 그는 창신동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착하고 붙임성 좋은 창녀 영희, 딸에게 폭력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딸을 걱정하는 절름발이, 그리고 함경도 출신의 한중혼혈 막노동꾼 서 씨...

함흥집이라는 술집에서 친해지게 된 서 씨는 어느 날 를 동대문으로 데려간다. 그는 통금시간의 고요와 동대문을 비추는 조명 속에서 커다란 성벽의 돌덩이를 들어올린다. 서 씨는 역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힘이란 존재의 이유였고, 유일한 유물이었다.


어느 날 오후 는 양옥집 식구들의 차에 흥분제를 탄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는 피아노를 퉁기고, 할아버지가 그를 떼어내기 위해 나온다. 방 안에서는 몇 번의 기침소리들이 들린 것 같다고, 젊은이는 바깥 이야기 속 에게 말한다.

현대 산업사회 기득권층의 규칙으로 움직이는 양옥과 소외자들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창신동, 젊은이는 창신동을 선택했다.


왜 그는 창신동을 선택했을까? 서 씨의 경우에도, 그는 타고난 힘을 이용하여 공사판에서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을 거절하고, 그 힘을 아껴 성벽의 돌을 들어 올리는 데 쓴다. 하지만 서 씨의 삶에는 생명력이 있다.

그 어떤 개념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개념을 위해 살아가는 그의 태도는 산업사회가 잃어버렸던 비물질적인 가치와 자유, 인간의 본성과 의지를 다시금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리라. 그가 창신동 사람들에게 느꼈던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일으킨 흥분제 사건도 양옥 사람들의 본성을 끌어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는 현대 산업사회라는 양옥에 갇혀있다.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산업사회의 시작을 알린 이후, 그 기차는 시간표를 만들고, 국제 표준시를 제정하게 하고, 교통의 발전으로 촉발된 경제와 행정의 발전은 우리를 완전히 숫자의 지배 하로 몰아넣게 되었다.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시계를 보며 계좌 잔액을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숫자로 바꾼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에 맞춰 제정된 양옥의 규칙은 관념까지 지배하게 된다. 흥분제와 마구 치는 피아노 소리 불러온 흥분과 무질서 속에서도 기침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양옥집의 침묵은 현대사회가 낳은 공포이자 비극이다. 인간 본성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시계가 되어 시계처럼 운행하게 되는 그러한 공포, 비극...


내가 문학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규칙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속인 문자로 창조되는 예술인 문학은 사회와 규칙을 초월해 개인을 드러내고 나를 투영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수많은 가치를 찾는 단서를 제시한다.

우리도 서 씨처럼 각자가 추구하던 가치가 있었다. 사회의 기대, 혹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우리는 이를 애써 외면해 왔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원하던 예대에 합격하고도 가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서도 있지만 결국은 끝까지 내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사실 못 했다기보다는 안 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도 취업, 안정적 삶이라는 현대 한국 사회가 제시한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우울과 자기혐오의 덫 속에서 다시 책을 잡기 시작했다. 예전엔 독후감이나 대회용으로 읽고 넘기곤 했던 책들을 다시 천천히 읽어나갔다. 김승옥 소설전집 속에 담긴 이 단편도 그 중 하나였다.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설을 고르라면 외국소설은 <희랍인 조르바>, 국내는 이 소설을 고를 것이다. 통금이라는 속박 속,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자신의 삶을 진정 즐기는 서 씨의 모습은 조르바의 춤과 함께 나의 표지가 되어 주었다. 지금은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그 예대에 지원했다. 취업이나 안정적인 삶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를 나한테까지 숨기고 속였을 뿐, 부끄러움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아직 젊고, 젊음이라는 권리에 주어지는 의무는 도전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도전하고 나아갈 것이다.

소설 막바지에 젊은이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틀려 있었을까요?”

이 질문의 주어는 소설 속 화자인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현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양옥에서 살고 있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