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문학 부문

 

오늘 당신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았는가. 책은 단순히 오락거리일 뿐만 아니라 정보 제공, 기록 집대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중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계몽'이다. 그러므로 책은 '도끼'라고 할 수 있다. 마음 한구석 단단히 얼어붙은 그릇된 사상을 부수는 도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당시 만연했던 차별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크다. 하지만 최근 여러 이해관계로 점철된 배타주의의 부상으로 '다름'에 대한 기피 현상이 들끓고 있다. 이는 인류 공동체의 와해로 불거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벼운 경종으로 치부할 수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우선 '''누군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길 바라며 펜을 잡아본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조그만 시골 메이콜에서 6살 말괄량이 스카웃과 그녀의 오빠 젬은 도무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부 래들리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게 할 장난을 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다. 장난이 차츰 시들어질 나이가 되었을 즈음 백인 여성 메옐라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는 흑인 청년 톰 로빈슨의 재판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변호사인 애티커스는 톰이 받은 혐의의 부당함을 완벽히 드러내며 무죄를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으나 대부분의 백인들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한다. 결국 백인들의 판결에 넌더리가 난 톰은 2차 공판이 오기 전에 탈옥을 시도하다가 숨지고 만다. 재판의 결과가 어떻든 애티커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메옐라의 아버지 밥은 하교하던 스카웃과 그의 오빠를 습격한다. 하지만 이때 부 래들리는 공방 끝에 그들을 지켜내고 아이들은 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앵무새 죽이기>는 당대 작가 하퍼 리가 느끼고 경험한 시대상을 때묻지 않은 아이의 시선으로 읊조리는 반자전적 소설이다. 노예 제도는 공식적으로 1865년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폐지되었으나 흑인에 대한 멸시와 핍박은 여전히 기승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비단 인종 차별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앵무새 죽이기>를 읽다 보면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계층 갈등이나 성 역할 강조 같은 문제들도 여실히 드러낸다. 가령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부 래들리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스카웃에게 후천적 성 역할을 강조하는 풍조, 가문을 중시하며 변변치 못할 경우 폄훼하는 사회 분위기는 개인의 가능성을 짓밟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를 위축시킨다. 차별이란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얼룩진 폐단이다.

 

책을 덮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앵무새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애티커스가 젬에게 엽총을 선물하면서 "어치새든 뭐든 잡아도 좋지만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는 죽이지말라"는 말을 한다. 그의 말로 미루어보아 앵무새란 '무죄의 상징'을 나타낸다. 고의적이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죄 없는 사람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했는가. 우리는 피곤하거나 건강상 문제가 생겼을 때 여드름이 나곤 한다. 이렇게 여드름이 나면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거나 연고를 잔뜩 바르며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건강 상태에 상관없이 여드름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건강한 것일까? 우리는 유색인종, 빈곤층, 심신미약자, 저학력자, 여성, 아이, 노인 등 소위 '사회적 소수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침묵시키는 건 미봉책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뭇사람들은 사회는 점점 성숙해지고 있으며 차별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며 안심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다. 인간은 서열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이따금씩 떠오른다. 어쩌면 끊임없이 나와 상대를 평가하며 서열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야만적 본성에 역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함께'라는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걸을 수 없다면 업어갔다. 이것이 어떤 요소들보다 인류가 우선시해야 할 최종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근 매스컴을 보면 안 좋은 소식만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세상을 묵시록적으로 해석하다가도 밝게 웃는 후임들, 선임들의 배려, 용사들 간의 따뜻한 격려를 마주하다 보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느낀다. 입대한 지 엊그제 같던 필자도 곧 전역을 바라보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의 군 생활을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부조리는 거의 청산되었고 용사들 간에 폭행과 폭언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관하다. 이러한 결실은 상부에서 내려온 방침과 더불어 용사들이 폐단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속한 군부대에 대한 설명일 뿐이며 어딘가 부당한 대우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계급의 차이는 상급자가 하급자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주지 않는다. 해묵은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부대 개편이 필요하다. 더 이상 비탄력적인 상명하복 시스템만으로는 강한 군대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과 핀란드 군대의 강함은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창의성과 주체성을 존중하는 점에 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다. 애티커스의 일장연설도 배심원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중 몇몇은 고심했고 반성했으며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한 걸음이 모이고 모이면 작은 물결이 일으키며 더 나아가 큰 파도가 굽이칠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중 당연하게 얻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