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를 위한 변명 - 이방인 by 알베르 카뮈 (문학)

 

경험은 늙은 아기의 어머니다. 이를 분명히 의식한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위대한 정신들 가운데 알베르 카뮈를 선구자로 들 수 있다. 그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함으로써 피고석에 앉게 된다. 그는 이를 태양 때문이었다고 자처하며 방아쇠를 당긴 건 우연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그 다음 날 여자친구와 해수욕을 즐기고 코믹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의 살인보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과거에 집착한다. 그렇게 인간 쓰레기로 낙인 찍힌 그는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는 평과 함께 사형을 선고 받는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보다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 니스 칠 냄새, 향냄새, 그리고 잠을 자지 못한 하룻밤의 피로에 대해 생각한다.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신데라는 위로는 타인을 향한 회의감의 발로일 뿐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은 뫼르소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직장을 다니며, 해수욕을 하러 다닌다. 그는 일상의 반복에 관한 자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삶은 습관이 더해져 아무런 의미없이 지탱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카뮈의 표현을 빌리면 무대와 같다. 삶이 무대라면 인간은 배우다. 내일도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가거나 직장을 다니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돈을 열심히 모아 언젠간 저 차를 사야지와 같은 목적 있는 생각도 무대장치 안에서 이루어진다. 습관으로 이루어진 삶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있기에 존재한다.

뫼르소가 살던 아파트에는 살라마노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철도 공무원 출신으로 하루하루를 연금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아내가 사망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는 동료에게서 스패니얼 개를 한 마리 입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망을 친 건지 아니면 잃어버린 건지 그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살라마노는 뫼르소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경찰서에 신고해보라는 조언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살라마노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의 울음소리를 들은 뫼르소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내가 왜 엄마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 독백을 그의 어머니와 살라마노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의도로 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스패니얼 개는 뫼르소에 비견될 것이다. 뫼르소가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에 반응했듯이, 스패니얼 개 또한 자신의 육체에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육체와 습관은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 육체는 습관을 사랑하고 영혼은 변화를 사랑한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의 시간과 동물의 시간을 구분했다. 인간의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른다면 동물의 시간은 원으로 흐른다고 그는 말한다. 러셀 또한 짐승은 몸이 성하고 배부르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렇듯 고양이가 추락하는 낙엽으로부터 겨울의 온도를 느꼈을지, 참새가 매미소리로부터 소나기의 끝을 눈치챘을지를 인간인 우리로선 알 수 없다는 것을 지성인들마저 망각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 점을 훌륭하게 지적했다.

인간은 사물에 언어를 부여함으로써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에 빠져 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봤을 때 자신이 만족하면 혁명을, 그렇지 않으면 퇴보를 외친다. 카뮈 또한 이 부패한 세계의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뮈가 철학자일지언정 소설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소설이란 질문을 함유하는 예술인데 카뮈는 이와 모순되게 소설로 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카뮈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다. 그가 소설의 기존 방식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답에 대한 규정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다음과 같이 자문했을 뿐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묻는다면 독자 역시 작가 안에서 생각하지 않을까?이런 걸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기존의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물을 때 카뮈는 독자 스스로 자문케 한다. 질문을 창조하는 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다. 이러한 그의 의도를 이 유명한 도입부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예정. 삼가 조의를 표함.’ 이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소설 역사상 최고의 첫 문장을 논할 때 이방인은 늘 빠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 첫 문장이라는 표현을 서두라는 표현이 대신해야 한다. 내가 이를 서두라고 표현한 것은 양로원에서 기인한 경험의 불화 때문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예술작품의 독자로서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그를 이방인으로 느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그를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누구인가?우리는 이 소설이 그의 어머니가 죽고 나서의 이야기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사망 장소가 양로원이라는 것과 양로원에 들어가 자주 울었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개를 잃어버리고 우는 살라마노로부터 엄마 생각을 하는 뫼르소를 통해, 그녀가 양로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절함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양로원에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이란 우리의 일상 속 흔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뫼르소의 고백은 우리의 그림을 처참히 찢어발긴다.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의 사랑했다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에 불과하다. 사랑은 타인을 향한 애정이 아닌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동기를 정직하게 말하는 습관을 가졌다. 그가 습관을 사랑했듯이 그의 어머니 또한 습관을 사랑했고, 이로써 그녀의 울음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면, 그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훌륭한 어머니 아래서 자란 나는 그의 독백에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경험에 의존하는 자신을 망각했다. 그의 독백이 자아내는 낯섦이란 그가 사랑받고 자랐다는 확신이며, 이 확신이야말로 끊임없이 해명해야 하는 부조리의 감정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이익에 근거하여 생각한다는 데 있다. 이를 스피노자보다 아름답게 증명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코를 통해 감각이 자극되는 것은 향기 혹은 악취라고 한다. 혀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단맛과 쓴맛이며 혹은 맛이 좋은 것, 맛이 나쁜 것으로 불린다. 촉각에 의한 것은, 단단하거나 연하거나 혹은 거칠거나 미끄럽다고 표현된다. 귀를 자극하는 것은 소음, 음향 혹은 화음이라고 불린다.”

모든 인간의 판단은 경험에 의존한다. 꼰대라고 불리는 자들이 대부분 늙은 몰골을 띠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험의 양은 인생의 세월과 늘 비례하지만, 사유의 깊이는 인생의 세월과 비례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이 아는 법은 알아도 깊이 아는 법을 모르는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진리라고 믿는다.


이로써 두 가지 결론이 탄생한다. 진리란 이성이 아닌 경험에서 기인하므로 진리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타인을 향한 모든 감정은 결국 자신을 위한 감정이다. 두 번째 결론의 근거는 이해에 관한 결정적인 모순으로 귀결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타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모든 믿음은 선민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때가 온다면,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창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