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침묵을 모른다는 것은 부모라는 존재들을 향한 낙관주의에서 드러난다. 교사들은 공부자극을 위한 쓴소리로 학생들에게 부모 얘기를 한다. 그들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책가방과 필기도구, 혹은 교복과 신발은 부모의 사랑을 결백할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평범한 회사원이 양로원에서 사망한 어머니에게 무관심한 것은 부모의 사랑을 배신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애당초 배신할 사랑이 존재했는가를 어느 누가 자문한단 말인가?
“내 존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의 심연은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한 이방인이다.” 시지프 진화 - 부조리의 추론
사형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은 뫼르소의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사람들이 처형장에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1939년, 베드만의 처형을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공개 처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의 처형에 관한 기사를 본 정부가 독자들의 잔혹한 본능은 자극한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은 건 1942년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다. 그의 목은 파리 외곽에 위치한 형무소에서 고작 서너 명의 감시 하에 날아갈 운명이다. 내일이면 처형에 관한 그의 기사가 실릴 것이고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텍스트를 읽으며 흡족할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무소에서 은밀하게 집행되는 살인 행위가 내일의 범죄자에게 겁을 준단 말인가?”
뫼르소의 사형은 복도에서 뛰는 아이들을 교사가 손찌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을 자발적으로 뛰지 않게 하려면 한 아이가 계단 모서리에 이마를 찧고, 피가 흐르는 머리를 움켜쥔 채 신음하는 광경을 나머지 아이들이 지켜봐야 한다. 이로써 그들은 복도에서 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낄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사형의 결과만이 중시될 때 홀가분한 박수를 사회에게 보낸다. 그러나 사형의 과정을 보게 될 경우 새하얘진 머릿속을 뒤로한 채 극심한 구토를 느낀다. 사형수가 모두의 분노를 자아낼 법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목이 잘려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몸뚱이가 헐떡이는 것을 본다면, 순수한 사람들(예컨대 신문 기사의 텍스트가 정의를 체감케 한다고 믿는 자들)은 반감을 금치 못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사형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야동을 보며 자위하는 청년을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반면에 출산을 마친 여성이 자신의 아기와 손을 잡는 광경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사형이 본보기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도, 짐승 같은 놈들을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무보수로 사형 집행인이 되겠다고 지원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 중 선택받는 집행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선택받지 못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고한 시민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들 중 적어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사형으로 해소하지 못한 살인 충동을 사적인 방안으로 해결할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합법적인 살인자로 선택받지 못했다는 회의감, 선택받은 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굴욕감이 내일의 사형수를 탄생시킨다. 그들의 사적인 방안이 무엇일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뫼르소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카뮈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진실을 간파하는 그의 과묵함은 사회를 위협한다. 보편적인 비밀을 지킬 줄 아는 과묵함의 결여와,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본 무책임한 성향이, 그를 감옥으로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내몰았다. 나는 진실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감동한다. 나의 감동은 그가 허구의 인물임을 시인할 뿐이다. 소설 속 인물이란 실존하지 않으며 이는 나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살해당한 무고한 아랍인은 무엇인가?우선 우리는 두 가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아랍인을 무고하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경험을 진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뫼르소의 독백으로부터 이방인의 잔상을 봤다. 그러나 이 아랍인은 패거리들과 함께 다니며 해변에서 뫼르소와 마주쳤을 때 칼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그를 무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경험과 아무런 연관도 없음을 시인할 뿐이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랍인을 살해한 뫼르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프랑스와 알제의 식민지 관계를 언급하며, 당시에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인 건 충분히 무마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일본군이고 살해당한 아랍인이 위안부였다면 한국인들의 변명은 분노로 대체될 것이다. 재판에서 사람들이 살인으로부터 눈을 돌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비난이 지닌 모순을 리히텐베르크의 통찰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느낄 뿐이다. 이 명제는 지나치게 들리지만 올바르게 이해만 된다면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아내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한 감각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결국엔 자신도 죽음의 노예라는 현실에 절망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슬퍼했다고 착각하며,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저 이방인의 목을 자른다.
이제 태양 때문에 쐈다는 그의 어처구니 없는 변명이 남아있다. 여기서 태양이 상징하는 바를 뫼르소의 또다른 독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는 땅에 묻혔고,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여름의 소나기가 매미소리로 바뀌면 나는 줄곧 슬픔에 잠겼다. 내가 선풍기를 틀고 낮잠을 즐기는 동안 저들은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다가 글을 쓴다. 나의 슬픔은 거짓이었을까?자신이 느낀 바 이상을 말하는 행위가 거짓이라면 정직한 자들은 죽음 앞에서 슬픔을 과시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불쾌감을, 다음에는 의혹을 야기시킨 뫼르소는 머지않아 사회에서 추방당했다. 그가 정직하지 않았다면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거나 못 본 체했을 재판소가 때에 따라서는 이처럼 버려진 존재를 기억하게 되었다. 카뮈의 말대로 “결국 사회는 어머니의 장례에서 눈물 흘리는 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더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뫼르소는 어제와 같이 떠오르는 태양과 아무런 변화 없는 세계를 혐오하며 방아쇠를 당긴다. 사형을 앞둔 그는 자신을 기도해주기 위해 찾아온 부속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죽음이 두려울 뿐입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삶은 인간이 짊어질 수 있는 최고 형벌이며 죽음은 모든 인간이 부여받는 최초의 구원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뫼르소의 살인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반증이다. 자살할 용기가 없던 그에게 단두대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기에 사는 것일까? 대답은 중요치 않다. 그저 나 자신에게 영원한 이방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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