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대한 확신 속에서의 삶
(문학)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전집 2』, 책세상(2010)
한 작가의 전집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라는 태양이 어떻게 뜨고 지는지 제자리에 굳어 서서 주야로 지켜보는 행위이다. 카뮈의 경우 그 점에 있어 더욱 각별하다. 카뮈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한 문제에 천착하여 수년간 고민해온 흔적들에 감탄하게 된다. 산문 <영혼 속의 죽음> 속 프라하에서의 여행기는 이후 <행복한 죽음>의 ‘메르소’의 경험으로 대체되고, ‘메르소’의 사고와 행위는 이후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것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전집 읽기란 작가의 가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알베르 카뮈 전집 2』에는 「작가수첩 Ⅰ」, 「시지프 신화」, 「이방인」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80여 년 동안 수천만 부가 판매된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줄거리나 구조를 여기서 다시 논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또한 각종 비평과 분석도 나올 대로 나와 있으니, 기존의 리뷰들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핵심적인 것만 짚고 넘어가 내가 느낀 바를 중심으로 풀어놓고자 한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하고자 한 것은 세계의 부조리성을 밝히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결론을 빠짐없이 이끌어 내는 것이다. 즉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고자 한 것이다.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같은 거인이 지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고 해보자. 그의 눈앞을 메우는 것은 득실거리는 인간들의 콜로니(colony)뿐이다. 그는 그렇게 정교한 생물체들의 꼼지락거림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의 인간을 직접 대면할 때 느끼는 것은, 유약해만 보이는 이 인간이 어떻게 그다지도 따분한 수십 년의 인생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카뮈는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동력이 ‘습관’에서 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굳이 죽지 않고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것은 습관에 올라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의식이 활동을 개시’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는 부조리를 대면하게 된다. 그 순간이 일단 찾아오고 나면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회귀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간과 죽음의 의식이다. 어느 날 그에게 병원에 가지 않고서도 시한부를 선고받는 날이 찾아온다. 살아온 시간과 남은 시간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 하게 되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잘만 굴러가던 인생이 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한 내일을.”(280쪽) 두 번째는 낯섦의 의식이다. 그는 자신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계에 체계나 통일성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하며, 세계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적외선은 측정기로 검출할 수 있고 버마 문자는 번역기로 알아들을 수 있지만, 세계는 경우가 전혀 다른 것이다. 세계뿐 아니라 나와 타자, 심지어는 나와 나 사이의 낯섦도 의식의 대상이다. ‘유리 칸막이 저쪽’에서 ‘무언극 같은 뜻 모를 몸짓’을 하는 타자나 ‘거울’ 또는 ‘사진’ 속 자신 역시 낯선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호흡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당연한 존재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기관지가 수축된 천식 환자의 머릿속에는 들락거리는 숨의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다. 일단 그것이 삶의 근본적 문제로 다가오고 나면 습관적으로 하는 호흡이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의식했다면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선택지는 자살이다. ‘삶은 무의미하다. 고로 나는 삶을 떠난다.’ 그러나 이 군더더기 없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피에 지날 수밖에 없다. ‘인간과 세계의 절연’이 곧 부조리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인간과 세계 중 한 축이 제거되는 순간 부조리의 ‘본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살이라는 결론을 짓고서도 정작 그 다음 행동을 전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살은 부조리의 해답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희망은 본디 종교적일 수밖에 없고,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동시에 이러한 비약은 세계 이상의 것을 요구하므로 자살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회피일 수밖에 없다. “세계 밖으로 벗어나도 부조리란 있을 수 없다.”(300쪽)
카뮈의 답은 반항이다. 반항은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며 희망과 자살을 거부하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세계와 팽팽한 긴장 속에서 힘을 겨룬다. 그러나 타협하는 순간 그는 운명의 무게에 깔린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세계를 끝없이 반추하며 ‘현기증 나는’ 열정 속에서 자신의 현존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삶을 최대한으로 소진하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반항을 통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명징하게 의식한 인간은 도리어 자유를 얻는다. “희망과 미래를 박탈당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동 가능성이 더욱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329쪽) 희망도 내일도 내세의 구원도 없는 세계라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삶’보다는 한정된 운명을 최대한으로 소진하는 것만이 가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명증한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가치의 척도는 무용해진다.”(335쪽)
이러한 부조리에의 뚜렷한 응시는 「이방인」으로 육화된다. 주인공 뫼르소는 거짓말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감정을 그대로 말할 뿐 절대 숨기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다. 그는 관능의 바다에 몸을 적시되 동시에 진실을 위해서 삶을 던질 줄도 아는 청년이다. 「이방인」은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엄마의 죽음에도 그저 피곤함을 느낄 뿐, 다음날 곧장 마리를 만나 수영을 즐긴다. 그리고 얼마 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레몽을 만나 그가 전 애인에게 복수하는 것을 돕는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어 별장으로 떠나지만, 그 해변에서 한 무리의 아랍인을 만나 다투게 된다. 레몽의 전 애인의 오라비 패거리가 뒤따라온 것이다. 작열하며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뫼르소는 아랍인을 쏜다. 그는 체포되고 심문과 재판이 이어진다. 그러나 재판은 마치 그를 빼놓고 진행되는 듯하며, 그의 무심한 태도는 사형 선고라는 결과를 낳는다. 사제의 회유를 거절한 채, 죽음을 기다리며 소설은 끝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개의치 않는 듯이 보인다. 법정에서도 형량에 타협하지 않고 느낀 그대로만 말한다. 그는 낯설다. 그는 오해받는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이다. 인과율의 세계에서 우연성은 이해되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 수영, 태양과 같은 것은 혐의 속에서만 조명될 뿐이다. 그러나 정작 인과율을 따지는 예심 판사가 사제처럼 십자가를 휘두른다든지, 뫼르소의 변호사가 ‘뜻밖의 일로’ 예심 심문에 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카뮈는 「이방인」 미국판 서문에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비록 신을 믿지는 않지만, 끝내 타협하지 않은 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같다. 그는 ‘매 순간 명징한 의식으로 삶의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며, 세계와 힘을 겨루고 끝까지 온몸으로 반항하는 인물이다. 소설 내내 ‘적게 말하는’ 문체는 마지막 순간에 반전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제 앞에서 세계의 부조리를 모조리 쏟아내고, 도리어 평화를 얻는다.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그대로 인식하고 반항하는 자가 마침내 자유를 얻어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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