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방인에서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바로 뫼르소가 레몽을 위해 거짓증언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레몽의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든지, 구조상 사형 선고로 이어지게끔 둔 문학적 장치라는 것이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카뮈가 미국판 서문에서 거짓말이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역시 해당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의문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이처럼 이방인은 분명 뚜렷한 주제를 품고 있으나, 이 소설이 간직한 신비와 모호함 덕에 여전히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함축적 어조로, 설명하기보다는 묘사하려는 카뮈의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 속 다른 인물들과 달리, ‘이방인인 뫼르소의 속내를 모두 듣고서도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다. 나는 여기서 몇몇 독자들이 하고 있는 두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 첫 번째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집 안의 고요함을 느끼고, 개를 잃은 살라마노 영감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머니를 떠올리기도 한다. 김화영 교수는 바다(mer)가 어머니(mère)와 발음이 같다는 점, 마리를 곧 마리아로 볼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어머니의 죽음 후 마리와 바다로 간 것은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 오해는 소설의 존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오해다.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나와 세계의 형제 같음을 느끼게 됨으로써 불화를 해소하는, 인간과 세계의 불화와 화해에 대한 철학적 우화라는 해석이 그렇다. 그러나 이방인시지프 신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면 이런 해석은 카뮈와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327)라고 밝힌다. 이방인다 켜든지 모두 꺼버리든지 하는 수밖에없는 영안실의 전기 가설은 부조리와 중간 지점에서 타협하거나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뫼르소가 말하는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332)이라는 맥락을 통해 보면 부조리를 통한 자유의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을 내뱉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을 고려해본다면, 세계와 나의 형제 같음은 서로간의 강렬한 긴장에 의해 오히려 끈끈히 묶인 세계와 인간의 관계, 구경꾼과 사형수의 관계, 즉 바위와 시지프의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뫼르소처럼 타협 없이 삶의 부조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자의 고독함은 희곡 칼리굴라에서도 이어진다.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에 무심한 칼리굴라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의 죽음(또는 마리)을 대하는 뫼르소를 보는 듯하기까지 하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인식능력이라는 대사는 죽음을 똑바로 응시한 채 사형집행 날 구경꾼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뫼르소의 그것과 다름없다.

칼리굴라 (일어서며, 여전히 우직한 어조로)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한 번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거야. 하지만 어쩌면 끝까지 논리적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지도 몰라. (헬리콘을 바라보며)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다 알아. 겨우 계집 하나 죽은 것인데 이토록 야단법석이냐 이거지! 아냐, 그게 아냐. 그래, 기억나, 며칠 전에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죽었다는 것 말이야. 하지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뭐야? 별거 아니지. 그런 죽음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냐. 그건 단지 내가 달을 갖고 싶게 만드는 어떤 진리의 표시에 불과해. 그 진리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명쾌하고 좀 바보 같은 거야. 하지만 발견하기 어렵고, 감당하기에 무거운 진리야.

헬리콘 그럼 그 진리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폐하?

칼리굴라 (얼굴을 돌리며, 특징이 없는 목소리로) 인간들은 죽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헬리콘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글쎄요, 폐하. 그건 얼마든지 타협이 가능한 진리군요. 주위 사람들을 보세요. 그 진리 때문에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칼리굴라 (갑자기 흥분된 말투로) 그렇다면 그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이야. 나는, 그들이 진리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이야. 헬리콘, 난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이 뭔지 알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인식 능력이야. 그래서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는 선생이 필요한 거야.

헬리콘 이런 말씀드린다고 언짢게 여기진 마십시오, 폐하. 하지만 폐하께선 우선 좀 쉬셔야겠습니다.

칼리굴라 (의자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건 못해, 헬리콘. 이제부터 그건 절대로 못하게 되었어.

(알베르 카뮈 전집 2, 568~570)

나는 지금껏 시지프 신화이방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작가수첩 Ⅰ」이 이 책에 자리하고 있는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카뮈는 스물두 살인 1935년부터 훗날 작가수첩이라 불리게 될 공책에 거리의 대화, 눈앞의 풍경, 순간의 감정 등을 섬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공책에는 장차 그의 여러 작품에서 성체(成體)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사고의 씨앗도 심어져 있다.

19378.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결혼, 출세 등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는데 패션잡지를 읽다가 문득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잡지에서 말하는 바로 그러한 삶)과 무관한 존재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

1그때까지의 그의 삶.

2유희.

3타협의 거부와 자연 속에서의 진실.(64)

3.

이 어두운 방에서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는 낯익은 존재 하나 없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해줄 곳 하나 없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몸짓, 이 미소는 무엇과 어울리는 것인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방인.(205~206)

심지어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단도 통째로 적혀있는데, 이렇게 작가수첩에서 미래 작품들의 유년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울 뿐 아니라, 작품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내가 카뮈의 전집을 읽게 된 것 역시 작가수첩이 계기였다. 이 년 동안 머릿속에서 굴려오던 것을 두 달 만에 받아쓰듯이썼다는 카뮈의 편지를 민음사 판 이방인해설에서 본 이후로, 나는 그의 전집을 찾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순간의 이미지들이 모여 생각이 발전되고, 그것이 구체적인 사유 또는 하나의 인물로 육화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던 것이다. 이쯤 되면 위에서 다룬 세 가지 글을 낱개의 책에서 접하는 것과 한 권으로 묶여 읽는 것은 전혀 다른 독서 체험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 역시 그랬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쌀쌀한 교실에서 읽은 이방인이나 올 여름 카페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읽은 시지프 신화, 행복한 죽음작가수첩을 거쳐 알베르 카뮈 전집 2라는 물결 속에서 만난 그것과는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