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밥이 가득 차 있어도 그 위에 반찬을 올려 먹듯이, 전집을 읽다 보면 동시에 다른 책들도 곁들여 읽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절로 두 책의 내용을 연결지어 생각하게 된다. 『알베르 카뮈 전집 2』를 읽으며 여러 책을 읽었지만, 지면상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서만 논해보고자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아래 장면에서 카뮈가 생각난 것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돌멩이를 걷어찬 조르바는 돌멩이가 떼굴떼굴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시지프 신화」 속 바위로 보였다. 단순히 2차대전이라든지 지중해라든지 하는 시공간적인 것을 넘어, 실제로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 「그리스인 조르바」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많다. 질릴 때까지 최대한으로 소유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조르바식의 ‘자유’는, 「시지프 신화」에서 본보기로 제시한 돈 후안의 그것과 흡사하다. 또한 오직 현재만 생각하며 “나는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보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니에요.” 하고 말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세계의 부조리를 명징하게 인식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 자체다. 마을 사람들이 과부를 죽이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들!” 하고 미미코가 외치는 것은 마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뫼르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조르바와 뫼르소는 각각 춤과 수영, 광산 노동과 트럭 올라타기를 통해 육체와 감각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인물들이다. 다만 시지프와 조르바라는 두 거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지프가 산 정상에서 도로 내려가는 바위를 보고 씩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는 반면, 조르바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고’ 굴러가는 바위를 따라 내려가며 달리기 시합을 할 것 같다는 점이다.
앞서 여러 번 보였듯이, 전집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특이한 체험이 된다. 그리고 작품들 간의 관계가 유달리 끈끈한 카뮈의 경우, 그 점에 있어 유별나다. 그 관계 맺음의 배경에는 「작가수첩」이 있다. 상기하였듯이 「작가수첩」에는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규율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다만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대한으로 명징한 의식으로 모든 것을 똑바로 보겠다는 카뮈의 태도는 「작가수첩」의 첫 번째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마음에 거리끼는 가책이 있으면 고백이 필요하다. 작품이란 고백이니 나는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말할 것은 한 가지뿐이니 똑똑히 보겠다는 것이다.(18쪽)
「작가수첩」의 원본 공책에는 펜으로 수차례 긋고 고쳐 쓴 흔적이 가득한데, 나는 이것이 최대한 명징하게 바라보고 기록하고자 했던 카뮈의 노력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카뮈의 전집을 읽으며 만난 카뮈의 모습은 또렷한 눈으로 어느 것 한 가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당연해 보이는 것에마저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편의를 위해 감정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 뫼르소의 고된 삶은 이러한 카뮈의 의식을 바탕에 두었을 것이다.
나는 근 몇 년간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라”는 빅터 프랭클이나 조던 피터슨의 말을 내 행동지침으로 삼고 살아 보려 시도해왔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한 번도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없었고, 의미 있는 세상이라기엔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순간이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만난 「시지프 신화」는 하나의 원형(原形)이 되어 내 의식 저 아래에 단단히 자리 잡게 되었다. 「시지프 신화」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고자 하는 글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인생에 가치는 없으나 살 만한 가치는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 생명 선언이자 유일한 확신이다.
이 전집이 출간되던 2010년, 보스턴에서는 니체와 니힐리즘에 젖은 하버드대 학생이 1905페이지에 달하는 ‘자살노트’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삶이 정말 무의미하고 근본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자살 외의 선택지가 없다고 적었다. 그는 그대로 사연이 있었겠지만, 나는 이제 이런 추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게는 「시지프 신화」의 반항하는 삶이 옳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수첩」의 초록빛 박하 냉차와 같이 뚜렷하고 명징한 의식만이 옳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심벌즈 소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이방인」으로서 죽더라도 조금의 타협도 없이 죽음을 맞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 속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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