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 노랑무늬영원의인법을 중심으로(문학 부문)

그간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 건 너무 오랫동안 집에서 책만 읽었기 때문일까. 올 여름은 지나치게 꿉꿉했고, 그래서인지 밖에만 나오면 몸에 힘이 빠져서 난 어느 샌가 벽에 슨 곰팡이처럼 침대에 찰싹 붙어 글을 읽어댔다. , 이러다가 정말 곰팡이가 돼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럴 때면 아버지 차를 훔쳐 무작정 서울을 돌아다녔지만, 글쎄 또 서울은 얼마나 좁은지. 일산대교, 김포대교, 양화대교, 마곡대교, 방화대교... 어딜 가도 그 지겨운 '대교'들을 건너야만 했지. 하루는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티나 싶을 만큼 꽉 막힌 마포대교 위에 갇히고 말았는데, 문득 에어컨의 한기가 뺨을 스치며 옆으로 길게 누운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한강과 오한기의 소설이, 그 속의 문장들이 두리둥실 떠올랐다. 왜 하필 한강과 오한기였을까. ...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강은 수식이나 은유 없이 담담하고 섬세한 어조로 폭력을 포착한다. 인물이 겪는 감정의 변화를 집요하다시피 묘사하는데, 그 과정이 아주 치밀해서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고통에 이입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은 자연히 소설 너머에 존재하는 실제 사회의 소수자들과 연대하게 된다. 한강 작품이 가지는 힘이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서술 방식의 절묘한 조합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을 읽으며 폭력에 반대하는 그녀의 소설이, 그 기저엔 또 한 겹의 폭력을 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어째서일까. 이 지점에서 난 또 다른 작가, 오한기를 떠올렸다. 후장 사실 주의자 오한기를. 오한기로 말하자면 한강과 가장 거리가 먼 작가겠지. 같은 후장사실주의자 정지돈은 오한기의 소설을 다음 세 문장으로 평한 바 있다.

1. 오한기는 한국 문학의 김기덕이다.

2. 오한기는 범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다.

3. 오한기의 소설은 수감자들이 사식 대신 받기를 원하는 물품 1위다.

어디서 내놓은 통계인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의 소설은 폭력으로 가득하다. 오한기가 쓴 단편엔 총기와 마약이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읽어 내려가다 아니, 이게 배경이 한국이 맞나, 하고 도로 페이지를 넘긴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거의 넘쳐흐르다시피 하는 이 과잉 폭력탓에 역설적으로 독자는 피해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혈육이 낭자하는 슬래셔 무비와 서랍장에 새끼발가락을 찧는 장면이 담긴 일상 영상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 두 작가의 간격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공감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폭력성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노랑무늬영원은 한강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단편소설은 좀 더 개인적인 것입니다. 삶이 저라는 인간을 흔들거나 베고 지나가거나 지금 지나가고 있는 그 자리의 감각과 생각과 감정을 씁니다."라던 한강 본인의 말을 염두에 두면, 노랑무늬영원은 그녀의 작품세계 전반이 공유하는 작가 자신의 가치관에 닿아있을 확률이 높다. 한편 오한기는 단편 의인법말미에 이런 말을 적어두었다. “소설은 늘 나를 비참하게 했지만, 대신 좋은 친구들을 선물해주었다소설은 본래 작가가 쓰는 것이다. ‘나는 늘 괴로워하며 소설을 썼다가 아닌 소설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는 전도된 표현에서 우린 작가 자신이 소설을 통제하지 못했음을, 뒤집어 말하자면 오한기의 소설이 작가의 내밀한 어딘가와 통한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두 단편집은 분명 극단에 선 두 작가의 가장 개인적인 부분을 비추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두 소설을 상호 분석해봄으로써 뭔가 유의미한 해석을 얻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교통 체증이 풀렸다. 오른 발로 악셀을 꾸욱 밟았다. 창문 사이로 바람 소리가 새들어왔다. 일단 집에 돌아가자. 돌아가서 고민해보자. 곰팡이한텐 남는 게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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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상처회복이다. 작중 인물들은 다양한 상황에 상처를 받는다. 단편 회복하는 인간밝아지기 전에는 지인의 죽음과 그 탓에 작중 화자가 겪는 괴로움을 그리는 한편, 훈자파란 돌, 노랑무늬영원은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중 다수의 작품이 서술자의 회복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왼손은 남성 서술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일한 단편이란 점에서 다른 수록작들과 차이를 가진다. 주인공 이성진은 은행 대부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원이다. 그는 반복되는 결혼과 직장 생활에 다소간 지친 상태다. 소설은 어느 날 그의 왼손이 말을 듣지 않으며 시작한다. 그의 왼손은 불현 듯 부장님 멱살을 잡거나, 우연히 마주친 첫 사랑 선혜의 손을 잡는다. 임의적으로 움직이는 왼손 때문에 성진의 일상은 점차 무너져간다.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끝내 왼팔을 잘라내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왼손도 쉽게 죽어주지 않는다. 오른손이 칼을 쥐었다, 왼손이 칼을 쥐었다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다결국 가슴에 칼을 꽂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왼손은 이성진의 원초아(id)이다. 왼손은 이성진이 마음속으로 원했으나 하지 못한 행동을 대행한다. 하지만 왼손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식의 독해는 맞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왼손을 잘라내려 했겠어. 이 지점에서 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이 소설은 자살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까? 다른 소설들처럼 회복과 치유를 암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체 뭘까.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의 몸은 어디까지 우리 자신의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는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적 성)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성의 범주야 말로 구성물이며,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정된 환영물이거나 페티시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인 범주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것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라고 입증된 범주이다.”(젠더 트러블)

우리가 결코 변치 않는다 믿는 것, 우리 자신의 것이라 믿는 성과 육체조차도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던 건 라캉이었지.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누구도 사회적인 해석을 거치지 않고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우리를 제약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과 욕망은 허구적인 것으로 결코 해소되지 못한다.

노랑무늬영원은 위 인식을 공유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아를 구성한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에우로파)

그러나 인물의 욕망은 결코 내재된 욕망, 본연의 욕망이 아니다. 타인의 욕망을 좇다보면 자연히 그 욕망이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 삼십 년 동안 잘못 살아왔다는 거짓으로 살아왔다는 느낌만이 강렬한 진실로 만져졌으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노랑무늬영원)

가 진정 원하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사회가 시킨다는 생각. 인물들이 겪는 상처의 근간에는 바로 그런 가상의 고통이 자리한다. 인물들은 열심히 자신의 욕망을 찾아보지만, 애시당초 진정한 욕망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갈등 관계는 깊어간다. 이 시점에서 인물들은 고통의 원인을 세상에 돌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온 세상이 나를 그물로 잡아 새장에 가두고, 단 한 발짝만 걸어 나와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아쇠들이 사방에서 당겨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도.”(왼손)

위 문장에서 주인공 이성진은 온 세상이라는 허구적인 권력을 앞에 내세워 자신이 갑갑한 이유를 설명하려한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온 세상이 나를 그물로 잡아 가둬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권력이 억압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부추긴다던 푸코의 말을 기억하자. 바깥으로 나오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 위해선 당연 새장에 가둔다라는 전제가 선행해야한다. 이 시선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대립은 사회적 제약과 본성 사이의 대립이라기 보단, 사회적 제약과 사회가 추동하는 욕망 사이의 대립이라고 봐야한다.

노랑무늬영원에서 다루는 다양한 폭력은 결국 사회적 제약과 제약이 부추기는 욕망 사이의 갈등으로 귀결된다. 인물들은 이 갈등에서 멀어지고자 하지만, 갈등 구조는 사회에 몸담은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다. 폭력이 없는 장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