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중략)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 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훈자」 중)
훈자는 속세에서 가장 먼 공간이다. 자본 권력이 손닿지 못했고, 인종 사이의 차별도 존재치 않는다. 수록작 ‘훈자’에서 주인공은 훈자에 가고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진다. 그러나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훈자 역시 권력의 편입을 막지 못한다.
“작은 규모지만 깨끗한 호텔들이 들어섰고, 차츰 늘어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밤 치안이 예전 같지 않아, 혼자서 골목길을 산책하다 가진 것 모두를 털린 여행자도 있다고 했다.”(「훈자」 중)
어떻게 해도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 지점에서 이성진의 자기 파괴는, 폭력 외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는 체념이기도 하다. 내가 한강 소설을 읽으며 왠지 폭력적이라 느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기저에 깔린 체념 때문이겠지.
『노랑무늬영원』은 어떤 소설보다 비폭력을 원하지만, 그 이면엔 폭력을 피할 곳 따윈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이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까.
물론,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나는 기대하고 있어요.
팔십 세의 나이에 그녀가 품은 기대 – 더구나 시간에 거는 기대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노랑무늬영원」 중)
팔십 년 동안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그 고통이 머잖아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건 얼마나 미련한가. 그러나 그 미련스런 행위에 한강 소설이 가지는 의의가 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 했다.” (「훈자」 중)
인물들은 이상 실현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계속 꿈꾼다. 이러한 노력은 인물에서 한강 작품 세계로 이어진다. 타인을 진정 이해해보겠다는 의지, 그 의지야말로 한강 소설을 빛내주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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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관계를 맺는 이상 폭력을 피할 수 없다. 오한기의 작품 세계는 이 지점에서 한강과 통한다. 그러나 폭력이 사방에 가득하다면, 그래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그걸 과연 폭력이라 부를 수 있을까? 폭력의 대립항인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폭력을 정의할 수 있는가? 「의인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 속에서 폭력은 더 이상 부정해야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일상적인 상태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 벗어날 필요가 없는 것,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해야하는 것에 가깝다.
「파라솔이 접힌 오후」는 일상화된 폭력을 심도있게 다룬 소설이다. 텍스트는 폭력에 노출된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헌책방 직원인 ‘나’가 가수 W의 평전을 설명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된다. W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컨트리 가수면서 동시에 “베트남 반전 시위” 및 “인종차별 반대 집회” 등 여러 운동에 참여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인종차별 반대 집회에 참여한 어느 날, 그는 KKK단의 습격을 받고 만다. 당시 연인 관계에 있던 미란다는 강간을 당한다. W는 “내가 또 뭘 잘못했어?” 하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야말로 왜 깜둥이 편을 드는데?” 사건 이후 W는 극단적인 인간 혐오자로 변하고 만다. “잔인한 방법으로 흑인을 학대”하고 실제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유혈사태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W가 있었다.” 「파라솔이 접힌 오후」는 그런 W가 쓴 곡이다. 한편 ‘나’는 책방에 자주 오는 유리에게 연심을 품게 된다. ‘나’는 유리에게 책을 권하고, 책에 관해 이야기한다. 대화와 소통. 어느 시점부터 ‘나’는 유리와 스스로를 미란다와 W에 비쳐보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나’는 유리가 책방에서 손님 중 한 명과 관계하는 것을 목격한다. 특이한 부분은 ‘나’가 화를 내거나 말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대신 파라솔을 펼쳐 든다. W도 나도, 폭력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파라솔을 제시한다. 이 소재의 의미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W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판잣집에 숨어 지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만이 W의 낙이었다. 음악은 적어도 W를 따돌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파라솔이 접힌 오후」의 노랫말대로 어린 시절 W는 파라솔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셈이었다. ··· 브룩스 일당은 낄낄대며 더 악랄하게 W를 괴롭혔다. 밤이 되자 그들은 떠나버렸다. W는 어둠에 휩싸인 마을을 응시했다. W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W는 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W는 그 무렵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파라솔을 접고 햇빛을 견뎌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당초 「파라솔이 접힌 오후」는 W에겐 폭력에 저항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노래의 의미는 작품 결말부에 이르러 변질된다. 작품 말미에 W는 미란다를 폭행하며 「파라솔이 접힌 오후」를 부르도록 강요한다. 폭력을 피해가기 위해 쓴 곡이 또 다른 폭력으로 귀결되는 결말. 이 지점에서 우린 "W에게 폭력과 평화는 같은 것이었다, 그가 죽은 건 파라솔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서술을 마주치게 된다. 인종 차별 반대 집회든 KKK든, 결국 타인의 의견을 강제하려 든다는 점에선 피차일반이다. 아니, 평화를 말하는 쪽은 스스로가 폭력이 아닌 척 기만한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차라리 솔직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편이 받아내는 입장에서도 더 낫다. 오한기의 작품들은 그런 가치관을 공유한다.
“불현 듯 현란한 조명 아래 뒤섞인 다양한 인종들이 더할 나위 없이 인위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증오를 드러내고 싸움을 일삼는 서부의 솔직함과 기나긴 전투에 지친 채 다리를 끌고 귀가하는 먼지투성이의 남자들이 그리워졌다.”(「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중)
‘파라솔’은 단순한 비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오한기의 작품 세계에서 폭력을 피할 곳은 존재치 않는다. 그보단 햇빛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단절을 의미한다. 소통은 폭력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소통을 하지 않아야한다. 그렇기에 작중 인물들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인물들은 사람을 책이나 도시락, 외계인 따위의 비인간에 빗대어 표현한다. 소설집의 제목은 ‘의인법’이지만, 소설 내부에선 ‘의인법’과 정반대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그렇기에 제목인 ‘의인법’은 오한기 특유의 비틀린 반어로 이해해야만 한다. 사람을 바라보고 “어라, 도시락이 말을 하네” 하고 비꼬는 것처럼.
“도시락 배달을 하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세상 모든 걸 도시락에 비유하는 것이다. 달리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심심풀이다. 나는 도시락에 붙은 밥 알갱이다. 도시락에 묻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고, 상한 반찬과 쉰밥이다.”(「열 네 살」 중)
그러나 인간이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열 네 살」은 떠돌이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소년은 가족도, 친구도 없다. ‘암소’라고 부르는 오토바이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재산도 없다. 소년은 어느 도시에서 알바를 하며 근근이 지내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암소’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런 소년도 어느 날 한상경, 제이니와 만나며 변한다. 소년은 제이니와 한상경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바라는 것도, 깊이 생각하는 것도 없던 소년은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암소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넓은 사막을 횡단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 남자는 겁쟁이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외톨이도 아니다. 단지 사랑에 빠져 무모한 모험을 시작했을 뿐이다.” 이 때 소년의 소설은 ‘가장 넓은 사막을 홀로 모험하고 싶다’는 고립에 대한 욕구와 ‘사랑에 빠져 무모한 모험을 하고 싶다’는 관계에 대한 욕구, 두 모순적인 욕구를 동시에 지닌다. 이러한 모순은 소설 전반에 걸쳐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은 관계-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열 네 살」의 끝에 제이니가 소년과의 동반 자살을 암시하는 건 그런 체념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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