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단절은 이뤄질 수 없다. 『의인법』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파라솔’을 욕구하지만 결코 획득하지 못한다. 대신 인물들은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한다. 한상경은 『의인법』의 여러 수록작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등단을 하지 못한 작가다. 그렇다고 달리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주위 시선에서 한상경은 종종 루저처럼 그려진다. 그럴수록 그는 소설에 매달린다. 소설을 쓰면 쓸수록 주위에서 고립되어간다. 한상경은 글을 쓸 때 “파리에 가”거나, 방안에 콕 틀어박힌다. 그러나 소설은 파라솔처럼 완전한 ‘단절’을 제공하지 않는다. 한상경에게 소설은 픽션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다. 그러나 이 공간을 ‘도피처’로 해석해선 안 된다. 그곳이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란 해석은 더더욱. 한상경은 소설과 희곡을 쓰며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소설 속에는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다.
“그 때 피웅덩이에서 구체가 떠오른다. 구체를 하얀 연기가 감싸기 시작한다. 구체는 점점 커지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남자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떤다. 연기가 걷히자 누군가가 보인다. 세 살 배기 아기의 얼굴을 한 외계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략) 총소리, 남자의 비명, 여자의 교성, 정체 모를 신음 소리.” (「의인법」 중)
한상경의 글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이미지는 뒤죽박죽이다. 억지로 기워맞춘 문장은 조롱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파편적인 이미지 사이에 한상경 본인의 상처와 욕구가 존재한다. 한상경이 쓴 소설은 그가 보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은 인간 본연의 욕구를 인정하고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 동시에 본인의 콤플렉스를 비웃고 조롱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잊으려는 행동으로 봐야한다. 스스로를 매질하고 포옹하는, 일견 모순된 내용이 한 소설 안에 담겨있다. 한상경의 ‘소설론’은 ‘나’가 한상경을 인정하는 시점에 작가 오한기의 소설론으로 이어진다.
오한기에게 소설은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고, 자학이다. 스스로의 욕구, 상처를 픽션이란 렌즈를 통해 파악하고 해소하려는 발버둥이다. 이 발버둥은 독자에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한기의 텍스트는 누구에게도 무엇이 옳다 강요하지 않는다. 오한기의 텍스트는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 논리와 윤리를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하는 방식과 비논리적인 문체를 통해 갈등을 해소한다. 오한기의 소설은 폭력을 인정하고, 극대화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폭력을 허구적으로 만든다. 오한기의 소설이 폭력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어떤 따스함을 느꼈다면 텍스트가 은연중에 취하는 그런 섬세한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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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대를 쥔 건 분명 여름이었는데 마침표를 찍으니 어느덧 겨을이다. 난 요즘도 곰팡이처럼 침대에 누워 지낸다. 가끔 마포대교를 탄다. 차는 여전히 막힌다. 그 옆엔 한강이 누워있다. 한강은... 말해 뭐하냐마는 변하지 않았다. 길고, 넓고, 습하다. 그 사이 한강의 신작이 나왔다. 오한기는 소식이 없다. 창밖엔 시시각각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 형형색색 곱아드는 낙엽을 바라보며, 삶도 글쓰기도 피차 고통의 연속이 아닌가, 그런 감상에 빠진다. 오늘따라 화장실 구석에 핀 곰팡이가 처량해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저 곰팡이도 나름 힘겹게 살아내고 있겠지. 지독한 락스를 피해가면서. 그러니까 그간 내가 얻은 거라곤 실제 곰팡이에게마저 이입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전부였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도, 하나도 안 변한 것도 같다.
여전이 바깥엔 수많은 사람이 어제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가슴 한 쪽엔 가슴 깊이 안타까워하는 내가, 또 한 편으론 글쎄 그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고 지금의 처지에 안심하는 자신이 있다. 참... 모르겠다. ‘고통’을 어떻게 다뤄야하는가, 문학은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가... 난 너무도 무지하고 계속 책을 읽는다. 어쩌면 해답이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이 함께 고민해보는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 한강과 오한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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