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르크스주의와 억압적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권력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통해 텍스트를 분석하는 이론이다. 즉, 사회경제적 계급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여 인간의 헹동양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통해 텍스트를 분석해볼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신념 체계이며 문화적 조건화(cultural conditioning)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문화적 조건화란 인간의 환경으로 인해 우리에게 작용되는 여러 조건들을 흡수하여 수용 가능한 행동, 즉 실제로 행할만한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행동 원천이라는 것이다. 

로이스 타이슨의 『비평이론의 모든 것』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자면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계 인식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억압적 이데올로기는 로이스 타이슨이 설명하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물질적/역사적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작용하여 세계인식을 하는 것에 대해 훼방을 놓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문제』 속 인물들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보이지 않는 계층과 그 계층간의 갈등을 통한 인간문제, 즉 계층간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전반부에서는 용연마을-서울을 배경으로 하여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에 대해 이야기한다. 후반부에서는 서울-인천을 배경으로 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사이에는 분명 계층간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착취는 관료기구 즉,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국가 장치가 아닌 인물 개인의 사유에서 어떠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지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2.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란 관료기구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말한다. 사회에서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때 그 이데올로기가 공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관료기구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가치에 사람들을 갇히게 함으로써 인간의 내부세계를 지배함에 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교육, 가족, 법률, 정치, 텔레비젼잡지, 종교, 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 예술, 스포츠 등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작용될 때 특징이 있는데 관료기구가 행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다르게 의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료기구의 물리적인 지배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그 의도와 기능이 일치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것의 기능과 의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행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관료기구의 지배체제에 봉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문제』속 인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가 어떤 지배체제에 봉사하고 있는 지 우리는 살필 필요가 있다. 그것을 분석한다면 작중 인물들의 이데올로기(행동원리)가 인간문제에 해당하는 계급 모순의 지배체제 속에서 그것들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3.   선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착취에 대한 인식

 

1) 용연마을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착취에 대한 인식

 

 선비는 덕호와 그의 지배계급에 의해 여러 착취를 받게 된다. 하지만, 선비는 그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까 5원짜리 지화를 던져주던 덕호의 얼굴을 다시금 그려보았다. 그리고 이때까지 볼 수 없던 그의 후한 마음![1]이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선비는 자신네 가족을 챙겨주는 덕호에게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5원을 줄 수 있는 위치에 덕호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급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한 선비의 아버지인 김민수가 단돈 1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 5원을 선뜻 내주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덕호의 행동 또한 지배계층의 조롱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선비는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선비와 덕호간의 사적인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작용하며 선비가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이다. 이는 그녀가 덕호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피지배 계급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그러한 계급간의 착취의 단적인 예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5원이라는 자본을 통해 감사한 마음이 풀리는 것은 자본주의와 신분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신분제라는 지배체제에 봉사하는 것은 선비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선비의 욕망, 즉 교육 이데올로기 역시 선비가 착취당하는 것을스스로 정당화시키게 만든다. ‘내 말년에 아무 자식도 없어 너희들이나 공부시켜 자미 붙이지, 붙일 곳 있느냐…… 선비는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가 살아온 듯한, 그러한 감격에 눈물이 핑 돌았다.[2] 선비는 공부를 시켜준다는 덕호의 말에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릴 정도로 감격한다. 이 뒤에는 선비를 유린하려는 덕호의 계략이 있지만 선비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교육

이데올로기 역시 선비의 세계인식에 훼방을 놓는 억압적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선비를 향한 덕호의 착취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선비로 하여금 그것들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그때 정당화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봉사하는 곳은 신분제 지배체제이다. 보이지 않는 신분제 지배체제를 묵살하고 그것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자본주의와 신분제는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기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의 수탈은 자본주의체제 명목하에 일어났고 이것은 인천에서의 노동계급의 착취를 통해 더욱 조명된다. 

 인천에서의 식민주의 여하에서의 착취를 알아보기 전에 달걀을 통한 선비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해방 인식을 확인하고 갈 필요가 있다. 달걀은 선비가 아주 아끼는 물건이다. 할머니가 그것을 모아서 소용이 무엇이 있냐 물어보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달걀은 선비가 모으는 자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어떠한 자본을 모으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 자본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비하는 모든 자원으로 적용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선비의 삶의 위안으로 소모되는 달걀이라는 소비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위안 역시 지배계층인 옥점에게서 착취당한다. ‘옥점이가 내려온 후로부터 매일 같이 낳는 계란을 하루도 건너지 않고 먹어버렸다. … 그때마다 선비는 아쉬움에 가슴이 울울하여지곤 하였다.[3]와 같은 문장을 보면 이러한 착취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선비는 달걀을 빼앗길 때 지배계층에 대한 달걀을 모두 깨치고 싶을만큼의 불만을 품는다. 이는 이전의 선비가 부모의 죽음 원인을 덕호에게 돌리지 않은 것과 비교해봤을 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인식하는 것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잘못된 사회구조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선비가 덕호에 의해 몸을 유린당했을 때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날에 믿고 또 의지했던 덕호! 그리고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같이 그의 장래를 돌보아주리라고 생각했던 이 덕호가…… 불과 한 시간이 지나지 못해서 이렇게 무선우 덕호로 변할 줄이야[4]라는 대목은 선비의 세계인식에 훼방을 놓던 교육 이데올로기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착취를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덕호가 식민지배의 일환으로써 지역을 담당하는 면장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가 있다. 덕호는 면장으로써 일본 아래에서 일하는 인물이고 이는 식민지배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착취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 아래 선비는 서울에서 오히려 자본주의의 산물인 인천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는 선비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님을 시사하기도 한다. 

 

 2) 인천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착취에 대한 인식

 

 선비는 쫓겨나듯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간난이를 만나 덕호에 대해서 밉냐고 물어보며 피지배계층의 교감을 하려고 한다. 물론 간난이의 말대로 간난이는 서울로 떠나와서도 덕호를 잊지 못한다. 이는 간난이에게 신분제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었고 착취를 당했음에도 인식을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둘의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배계급에 대한 원망은 간난이의를 통해 여실히 들어난다. 그리고 용연 마을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여정 중 하나인 서울은 간난이의 말을 통해서 용연마을보다 더한 지배계급에 의한 식민 지배체제를 암시한다. ‘저 번화한 도시에도 얼마나 많은 덕호가 들어 있을까?[5]가 그 증거이다. 즉, 간난이의 내재적으로 작용하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봉사하던 면장이자 계급에 대해서 해방된 것이다.

 인천으로 향한 선비는 지주의 집에서 얹혀사는 계급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역시 자본가(부르주아)에 의해서 착취를 당하고 그 속에서 선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의 인천이라는 것이 어떤 지배체제 하에 있었는지 역사적 상황 속에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식일본과 인천은 깊은 연관이 있다. 일본은 강화도와 영종도를 인천의 명소를 소개하는 팔경에 넣었는데 이는 식민주의 지배체제와 관련이 있다. 조선의 개항과정에서 이루어진 운요호 사건과 조일수호조규는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식민지배의 시작을 알린 강화도와 운요호를 명소로 함으로써 억압적 국가장치를 작용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천은 일본이 조선땅을 통해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 이용했던 개항장으로써 제국주의 체제하에 이용되었다. 물론, 중일전쟁의 시작인 1937년과 1934년 저술됐던 인간문제』사이에는 3년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1930년 초기부터 대규모 공장이 세워지면서 병참기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공장은 소설 속 간난이와 선비가 일하는 대동방적공장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인천에서는 억압적 국가장치뿐만 아니라 선비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통해 식민주의와 자본주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선비가 대동방적공장에서 일하게 된 이유 중 두 가지는 돈과 공부다. 이것을 통해 선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어떻게 자본주의 지배체제와 식민지 지배체제에 봉사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돈에 관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선비는 자본에 대한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는 선비가 덕호의 집에서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장의 감독은 여공들에게 공장에서 일하면 저축과 저금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다 말한다. 뿐만 아니라 선비가 인천으로 오게 된 결정적 이유 역시 돈, 자본 때문이다. 이는 선비의 내재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이며 이것은 선비가 지배계급인 감독에게 착취당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공부이다. 교육 이데올로기 역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덕호의 집, 즉 용연 마을에서 선비를 억압한 이데올로기이다. 공장에서도 큰 범주에서는 여공들, 그리고 선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나타난다. 이때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지배 계급인 덕호와 공장주가 공적인 억압적 국가장치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덕호의 경우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이유에서 펼쳐지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이다. 선비에 대한 좋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돈을 주거나 공부를 시켜주려는 속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주의 경우에 와서는 억압적 국가장치인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가 헷갈리게 된다. 공적인 일인 공장에서의 지배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이해한다. 억압적 국가장치는 폭력으로써 작용하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소설에서 등장한 공장의 말은 폭력보다는 여공들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선비가 공장에서 일을 계속해서 하는 이유인 야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써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돈과 공부, 즉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교육 이데올로기가 선비의 신념체계이며 그로 인해 착취 당한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교육 이데올로기는 이미 선비의 머릿속에서는 덕호가 공부를 빌미로 선비를 유린한 것에 의해 인식되어 있다. 그렇기에 선비는 교육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인식한 상태이고 어느 정도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덕호가 공부시켜주겠다는 것을 미끼 삼아 그의 정조를 유린하던 장면이 휙 떠오른다.’[6]라는 대목에서 이러한 선비의 새로운 인식을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선비는 자신을 유린하려던 감독을 피할 수 있었다. 교육 이데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