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부터 -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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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죽음은 항상 가까웠다. 채 돌이 되기도 전 그의 친아버지가 총기 오발로 목숨을 잃는다. 열일곱 살에 그의 의붓아버지가 엽총으로 자살한다. 스물세살이 되던 해 총기를 검사하던 중 자신의 격발 실수로 친구가 죽는다. 그의 삶에 총알처럼 박힌 죽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의 누나와 형이 장티푸스로 연이어 병사한다. 그의 첫 번째 아내가 음독자살로 생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대통령이 자살한다. 총성처럼 따라붙는 죽음을 피하지 못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1937년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자 그는 더 이상의 연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이 거대한 죽음의 쉼표는 그의 자살 이후에도 연이어 격발된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장녀와 장남이 연이어 자살한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의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삶과 죽음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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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시오 키로가에게 삶은 죽음과 구별될 수 없었다. 그에게 삶은 곧 일상에 드리우는 낯선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런 측면에서 <깃털 베개>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알리시아가 급성 빈혈로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은 그녀와 가장 밀착되어 있었던 ‘깃털 베개’에 있었다. 수면의 신 휘프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형제인 것처럼, 삶에 가장 절실한 수면을 위한 도구가 죽음의 원흉이 된다. <표류>, <일사병>, <천연 꿀>은 어떤가. 열거한 단편의 공통점은 생존을 위해 자연과 투쟁하지만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으로부터 구축하려는 시도는 항상 역으로 가장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는 기담으로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항해하는 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다로부터 사람이 살기 위한 도구였던 배가, 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굳이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오라시오 키로가에게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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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라시오 키로가에게 죽음은 조수 간만의 차와 같아서 주기적으로 밀려들어 삶의 해안을 부수고 돌아갔다. 낯선 죽음이 익숙한 삶에 문득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플갱어를 소재로 하는 단편 <일사병>이다. 전승에 따르면 도플갱어를 만난 사람은 죽는다. 도플갱어는 내 삶에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의 사자다. 해당 단편의 주인공이 도플갱어를 만난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야구아이>에서도 언뜻 보면 개로 보이는 “하얀 얼룩 같은 것(P.184)”이 갑작스레 찾아들 때 죽음이 발생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대상이 남이 아닌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견병에 걸린 개>는 갑자기 찾아든 ‘광견병’에 걸린 대상이 ‘개’가 아닌 ‘나’일수 있음을 드러내어 독자가 가질 수 있었던 최소한의 심리적 거리감마저 박탈한다. 죽음은 '저기' 있는 게 아니고 '여기' 있다. 삶의 타자는 죽음이다. 우리는 내 삶의 타자인 죽음을 결코 몰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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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낯설음이라는 감정은 공포감의 한 특이한 변종인데,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pp405~406)” 삶과 죽음이 나누일 수 없다는 문장은 불안하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취하든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삶의 근간을 흔들고 위협을 느끼게 한다. 익숙한 삶이 낯선 죽음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불안(uncanny)을 느낀다. 가장 강렬하고 섬뜩한 <목 잘린 닭>부터 살펴보자. 해당 작품은 부모에게 있어 '생육과 번성'의 결과물인 자녀가 “오랜만에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P.83)” 형언할 수 없는 존재로 돌변해 죽음을 야기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삶은 곧 욕망하는 것이다. 허나 욕망의 대상은 죽음의 원인이 되고는 한다. 욕망의 대상이었던 다이아몬드가 목숨을 빼앗는 (낯선) 무기로 돌변하는 <엘 솔리타리오>가 그렇다. 연애소설인 <사랑의 계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미인이었던 리디아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남루한 마약중독자가 되어 귀환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남기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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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삶은 지속되는 죽음의 불안을 최대한 외면하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행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죽음의 순환구조 속에 갇혀 주체의 결핍만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가장 이질적인 두 단편 속에 존재한다. 이야기의 결말이 상실이나 죽음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두 단편은 다른 단편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에서 ‘나’는 ‘외삼촌=우물 속(죽음)’을 자신의 지혜를 통해 영리하게 극복한다. 그 원동력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즐기려는 아이의 천진함에서 나온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나’와 마리아 엘비라의 사랑은 긍정을 통해 성취된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열병(마리아 엘비라)과 상황(‘나’)에 의한 ‘광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어떤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해당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흘러 가닿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포용하여 생을 거세게 들이받는 힘, 그것이 이야기의 강물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다. 우리는 삶을, 자신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모순과 불협화음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오라시오 키로가의 어둑한 삶과 문학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단 하나의 열쇠이다.
“우리는 내 삶의 타자인 죽음을 결코 몰아낼 수 없다”
"오라시오 키로가에게 죽음은 조수 간만의 차와 같아서 주기적으로 밀려들어 삶의 해안을 부수고 돌아갔다." 얘 문장 좀 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