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좋은 소설이 아닌 읽어야만 하는소설

장강명 연작소설집 산 자들

 

 

 

리얼리즘이 한국 소설의 전부인 시대가 있었다.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가 지배한 1980년대 한국 소설은 대개 현실을 향해 있었고, 현실과 대결했다. 그런데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소설은 어느새 문체에 무게를 싣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사보다는 문체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재난은 한국사회의 모든 면에 변혁을 요구했는데 소설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로 방향을 틀었던 대다수의 분야와 달리 소설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 눈을 돌렸다.

 

문예창작학과라는 붕어빵 기계에서 찍어낸 듯한 글쓰기가 한국 소설의 주류로 정착했다. 서사는 외면하고 문체, 그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어휘와 감성으로 독자들에게서 멀어졌다.

 

한국사회와 정면으로 대결하던 소설이 서사에서 문체로 무게중심을 옮기자 독자들은 한국 소설에 대한 관심을 줄여나갔다. 한국 소설은 어느새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밀려나고, 어느새 일본 소설이 상위권을 착착 차지하게 됐다.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 일본 작가들은 깊이는 차치하더라도 서사에 공을 들였고,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한국 소설의 갈라파고스화는 2010년대에 극에 달했다. 한 문장을 쓰더라도 미문이 아니면 제대로 대접받기 어려웠다. 갈라파고스화가 심화될 무렵 등장한 소설가가 장강명이다. 그는 일간신문 기자 출신으로 문체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서사에 치중했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을 통해 등장한 그에게 한국 문단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장강명은 전업작가로 전향하고 두 해에 걸쳐 굵직한 문학상 3개를 쓸어담게 된다.

 

그의 소설은 아름답게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독자들의 멱살을 잡아채 추악한 현실 앞에 던진다.

"이걸 봐, 이런 세상을 원한 거야?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이 맞아?"

 

그의 소설은 하나같이 강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데, 그의 데뷔작 표백에서부터 이런 문제의식이 두드러진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장점이 발휘된 예라 하겠다.

 

장강명의 연작소설집 산 자들21세기 난쏘공에 '가깝다'. 비록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만한 충격을 주지는 않지만, 현대 한국인이 겪고 있는 노동 문제를 가감없이 다룬다. 우리가 러시아의 근현대를 보기위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프랑스혁명기의 혼란을 읽기 위해 빅토르 위고를 읽듯, 21세기 한국의 노동에 대해 알고 싶다면 산 자들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소설도 마찬가지다. 단지 현실을 베낀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게 아니고, 작가 특유의 관점이 묻어나야만 개성 있는 소설이 된다. 소설 또한 반영의 현실이다. 어떤 현실을 어떻게 뽑아 재배치하고, 독자를 설득할 것인가. 이것이 소설이 반영의 현실이 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산 자들의 챕터 구성은 절묘하다. 자르기-싸우기-버티기라는 세 챕터는 한국인이 당면한 노동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장강명의 관점을 반영한다. 여백이 부족하니 몇 편만 살펴보자.

 

알바생 자르기는 자기잇속 챙기기만 바쁜 알바생을 자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간 간부 이야기다. 근무태도가 성실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알바는 자르는 게 맞지 않은가. 그런데 알바도 사정이 있었다. 지하철 파업 때문에 지각했고, 불법파업 규탄대회에는 다리 부상으로 불참했으니까.

 

시스템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정직원도 아닌 알바생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알바를 위한 회사는 없다. 잘려나간 알바생은 4대 보험 미가입 사실을 확인하고, 두 달 뒤 보상을 요구한다. 과한 요구를 할까 걱정하던 간부는, 알바생이 “150만원을 요구하자 허탈함을 느낀다. 까칠하게 행동해 회사에 큰 피해를 입힐 것으로 보였던 알바생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회초년생일 뿐이었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과도하게 경쟁하다 몰락하는 자영업자들을 그렸다. 두 프랜차이즈 빵집과 하나의 개인 빵집이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인다. 프랜차이즈에 갑질 당하며 삶과 노동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람들, 그리고 프랜차이즈의 공세에 문을 닫게 된 개인빵집.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예전에 있던 개인 빵집은 모조리 사라지고, 동네 곳곳에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선 지 오래다. 이익 앞에서는 신사협정도, 근무시간의 마지노선도 없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오로지 경쟁, 또 경쟁이다. 삼국지의 결론은 천하통일(天下統一) 아니던가. 그런데 과연 냉혹한 제살 깎아먹기 경쟁 속에 하나만 살아남는 것이 우리 삶의, 우리 노동의 답이 되어야만 할까.

 

<음악의 가격>은 소설보다 르포에 가깝다. 자신의 음악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재생될 때마다 몇 원을 받는다는 뮤지션의 증언은 뮤지션의 현실이 천국보다 지옥에 가깝다는 걸 보여준다. CD를 수십만 장씩 팔던 시대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음악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단돈 몇 원으로 재생된다. 음악의 가격은 10년 사이에 175만 배 싸졌다. 뮤지션은 교육업자로 살아야 연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뮤지션은 뮤지션인가, 교육업자인가.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이 혼란스러움은 비단 소설 속 뮤지션만의 것은 아니리라.

 

누군가는 자르고, 누군가는 잘리며, 그 둘은 싸우고, 또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버틴다. 산 자들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의 현실이다. 이 연작소설집에는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소설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집을 읽으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과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읽으면 좋다, 가 아니라 읽어야 한다로 귀결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어야 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