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에는 존 바스(John Barth)'가 '고갈의 문학(The Literature of Exhaustion)'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1982년에는 급기야 레슬리 피들러(Leslie Fiedler)가 '문학이란 무엇이었던가?(What Was Literature)'라고, 과거형을 문학에 붙이기에 이른다. 이 제목 선정에 대해 앨빈 커넌은 '대중문학의 옹호자인 그는 고급 교양 문학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던 것이다'라며 고급 교양 문학은 거의 심정지 상태라고 선고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시대정신' 운운하는 그 아름다운 말을 다시 한 번 더 부순다.(국어 교사들에게는 앞으로, 참으로 여러 번 사과를 할 듯하다) 문학은 더 이상 창조적 상상력이 없는, 문학적 콜라주 내지 '짜깁기'로 전락하고, 이내는 가부장적이고 백인우월주의에 가득찬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고 앨빈 커넌은 말한다.
이런 시대에 문학이 대중들 앞에서 논의한 건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도서정가제' 같이 세법과 가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사가와 잇세이처럼 자신의 살인을 소설로 쓴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런 것들은 대중들 사이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광선이 번쩍번쩍하는 21세기 매체들에 사로잡힌 독자들에게 정말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다. 엽기적이거나 헛웃음이 나오는 논의긴 하지만, 그 정도일 뿐이다. 심지어 지금은 텔레비전마저도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며,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매체가 보편화된 시대이다.
무너지는 문학
이후 앨빈 커넌은 문학의 위치와 공간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문학은사회와 거리를 둔 그 스스로만의 장엄함에 그 '권력(power)'을 유지해왔지만, 그러한 '사회와의 거리두기'-즉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그에 따라 기존의 예술에 대한 정의가 해체되어오고 있지만 문학은 그것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문학을 논의하는 공간이 그 비좁은 대학 강의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옥스퍼드에서 의무적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시절도 있었다. 즉, 교육받고 교양 있는 중산층의 증표와도 같은 것이 문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문학은 정말로 '학문'으로서, 그들만의 교양 있어 보이고 현실에서 들떠있는 것에 지나지 못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문학이 학문으로서 분리된 것에는 프롤레타리아, 도시 빈민들의 계발과 교화, 그리고 민족주의 등 19세기 당시 사회의 사람들을 끌어내는 요인들에 기인했다. 그리고 문학은 점차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권리를 주고 깨어나게 한 만큼, 문학은 숙명적으로 이 프롤레타리아들의 심판을 받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볼 때 셰익스피어? 단테? 그들은 기술꾼일 뿐이다. 문학적 정신이 어떠니 하는 것은 노동자의 인권 향상이나 노동 생산성의 향상 중 어느 쪽에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서커스의 공굴리기처럼.
그렇다면 그런 기술을 논하는 문학 비평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했는가? 우선 문학 비평 자체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이는 과학에서 철학을 왜 필요로 하는가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없는 과학은 온전히 걸을 수 없으며...' 같은 도덕 논의는 아니다. 지금의 과학은 정말 많이 진보해서, 에테르 같이 '존재하지 않는 물질'에 대한 가정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당시로서는 과감했던 가정들이 얼마나 사이비적인가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의 '구동 원리'는 그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 톱니바퀴를 돌리는 나사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문학도 나름대로의 구동 원리라는 것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통찰하겠다는 것이 우리 비평가들이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오히려 문학에 너무 가혹했다. 앨빈 커넌에 따르면, 비평가들에 의해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마저도 '문학성(nature of literature)'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도 그저 우리가 읽어온 문학들의 그런 여러 장르가 뒤섞인 잡동사니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그들이 숭고하게 지켜오던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아, 낭만주의! 앨빈 커넌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바가 있다면, 문학에 낭만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 같다. 사실 문학이 죽었다고 한다면, 이전 시대의 문학의 증거들이 죽어야만 하니까 곧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에의 사형선고와 마찬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맞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문학의 순수함이라는 말을 그들 스스로 져버리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앨빈 커넌은, 보수적 비평가들이 포크너를 '비정치적이고 문체와 기술에 치중한 작가'로 재정의하고, 대학의 급진주의자들이 문학을 정치적 수단으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 문화의 대항마였던 문학은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의 대변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60년대 일어난 이 과거를 바탕으로 1990년에도 그러한 문학의 권력의 대변자적인 역할에 대한 비판적 비평이 성행했다. 그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한 국어 선생들의 명언 중 가장 큰 것, '문학은 순수한 소설가의 표현이다'는 얼마나 허접한 빈말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책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하고 말해온 최상의 것"이라는 표현이 결국 문학을 가리키는 수식어가 되지 못 하게 된 것이다. 아예 E.도널드 허쉬는 '문학이란 무엇이 아닌가?(What Isn't Literature)'라고 썼다.
세상물정 모르는 문학
그런 덜떨어져 가는 문학을 법은 생각보다 문학을 보호해주고 있지만, 그러한 법의 요람에 누운 문학의 인식은 너무 값쌌다. 창작의 자유, 저작권법, 인세 등이 문학을 보호해주는 법이다. 그 정도밖에 없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학은 사회에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기술(記述)하는 활동'이라는 정의하면 어떨까 하는 환상이 얼마나 허무한가는 이전에 계속해서 적어왔다. 이러한 허무에 비해 높은 가치를 가진다는 지적은 정확히는 예술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어떠한가?-'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똥을 싸더라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안타깝게도 앤디 워홀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그리고 법은 계속해서 작가를 정의하고,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권리와 범위를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통해 돈벌이하는 이들-문학계에서는 출판사-의 탐욕이다. 이는 현대인의 탐욕, 공격성 등이 뒤범벅되어 나타나는 참으로 경악스러운 것이라고 앨빈 커넌은 적고 있다. 그렇다고 그는 예술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예술은 여전히 "우리 자신보다는/타인에 대한 아픔 속에, 인간의 친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있다는 선고는 들었다. 그렇다면 이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문학은 스스로의 '텍스트'를 지켜야한다. 텍스트를 훔치는 행위를 우리는 '표절'이라고 말한다. 표절에 작가들은 얼마나 민감했는가? 이 문제를 21세기도 확실히 해결하지 못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사적 대화의 문학적 인용 사건(김봉곤), 미시마 유키오 표절 사건(신경숙) 등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작가들은 텍스트의 가치를 알고 이를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 얼마나 빈말인지를 아직은 반성할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의식 부재가 왜 발생하느냐에 대해 앨빈 커넌은 이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퇴색되어가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있다. 표절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명확한 정의가 이루어지지를 않는 상황에서 일부 철학자들은 아예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모든 텍스트는 선조들의 텍스트들의 어떠한 형식으로의 모방이며 그러하므로 새로운 독창성은 있을 수 없고, 즉 표절은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문학은 이렇게 말했다. "표절이란 도둑질과 같은 범죄 행위보다는 차라리 자만과 같은 영혼의 죄에 가까운 것이다."(J.O.옴슨) 앨빈 커넌은 이 감상이 아주 값싼 것이며 이로 인해 문학이 무너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럼 글쟁이들은 어쩌라는 거지?
그리고 30년이 족히 흘렀다. 그사이에도 많은 책들과 문학이 나왔고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고-이 중에는 오르한 파묵처럼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40도 안 된 작가도 있었다.-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 사람들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학은 제대로 응답하지 못 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참조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 Axt지 2018년 1/2월호에서 소설가 이인성 씨의 인터뷰에는 이 내용들을 압축한 듯한 질문들이 여럿 나왔다. 자본주의에 녹아 닳아버린 문학, 다양성을 상실해가는 문학 등등. 그 중에 이 말이 제일 인상 깊었다.
"만화나 드라마에서부터 영화, 뮤지컬 등, 문학보다 훨씬 현란하게 제공되는 갖가지 재미있는 스토리를 탐닉하고 있는데,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어떤 언어의 자리가 요청된다면, 언어만이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해진다면 문학은 되살아날 것이다. 그런 결핍을 독자가, 그리고 작가가 스스로 느끼는 순간이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