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컨텐츠라는 것은 결국 그렇다. MZ세대에 대한 이런 저런 논의 중에 "자신의 소비를 SNS를 통해 공유"한다는 것이 있다. 즉 예전처럼 명품백을 매고 다니는 것을 보이는 걸로 주위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사람이 있던 X세대, Y세대 시절보다도 더 간단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 성향을 보이고 과시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이러한 소비의 과시에 의해서 계층과 그룹이 형성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되는 트렌드로 더더욱 쏠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특징을 가장 크게 반영하는 것이 "밈"일 것이다. 최근에는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유행하는 D.P와 오징어 게임의 장면들이 합성되고 있던가, 이러한 영상들이 수십, 수백만의 조회수를 얻는다. 유명 보이그룹, 걸그룹의 음악은 몇 천만, 몇 억도 나온다. 이렇게 '현란하게' 전개되는 것들 사이에 텍스트가 있고 문학이 텍스트를 안으려고 발버둥치며 덩그러니 있다.
문학은 스스로 너무 오만했고, 너무 타락했다. 지금의 X세대, Y세대(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국어 선생들의 세대)가 기억하는 낭만의 문학은 죽고 오래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자취조차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수입되지 조차 못 하고 있다. 사실 '삼십만 킬로미터'라는 비유가 가능하다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 되면 시간이 무한대로 수축해서 따라잡을 시간이라는 것도 무한대니까.
문학은 점점 더 낯선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23살 혹은 24살에 이르른 한 상처 받은 젊은이의 성숙한 모습을 갖게 된' 그러한 성장의 과정에서의 낯선 광경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늙고 이 세상의 어느 오래된 예술보다도 뒤틀린 모습을 하고 이 시대에 있어서다. 그렇다고 이들을 당장에 쫓아내려고 하면 21세기의 텍스트마저도 모두 쫓아내게 되겠지, 그러면서 어쩔 수 없는 수준의 지위를 겨우 받고 있을 뿐이다.
앨빈 커넌의 에필로그도 이러한 작가와 독자들의 염원이 모두 합쳐질 때에 가능하다고 말을 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를 알 수는 없다. 21세기에 발맞추려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는 것이 시도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디지털 구보 2001' 같은 작품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 그럼으로 급성장을 했다는 소식까지 같이 실린 적은 없다. 아마 이런 시행착오 수십, 수백, 수천이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 우리가 언제 문학을 원할까,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다들 말을 더듬고, 말줄임표로 축약하는 속에 작가들에게 숨기고 있는 '작가들은 언제 그것을 열망할까?'라는 질문에 작가들은 언제 반응하고 답변을 하게 될까? 그걸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마음속의 질문이라는 건 언제나 마음속의 질문이지, 드라마처럼 어느새 그 질문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이 나타나거나 증거가 나타나 답변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23살, 내지는 24살로 성숙해간다.
문학은 언제쯤 21세기에 도달할까.-비문학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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