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4시간 독후감 타임어택
분야: 비문학
1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떼굴떼굴 굴러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서사에 드러나는 시간 형식이 시대적 심리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체 어디서 이런 기똥찬 생각이 나왔는지, 생각을 거슬러 가봤다. 그랬더니 사실 내가 처음 한 생각은 아니었고, 시간의 향기라는 책의 문장을 읽고 생각하다 잡아낸 거였다.
“탈시간화로 인해 서사의 진전은 불가능해진다. 서술자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극히 사소하고 하찮은 사건에도 오래 머무르게 된다. 이야기는 구분과 선별을 전제한다. 느린 서술의 원인은 서술자가 의미를 형성하는 경계와 단락에 따라 사건을 구조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선별 작용을 하는 서사 궤도의 부재로 인해 서술자는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수 없다. 이야기는 완전히 박자를 잃고 혼란에 빠진다. 이야기의 타성惰性과 조급성은 모두 서사적 긴장의 부재를 드러내는 징후다. 이야기는 완급의 조화로운 교체를 가능하게 해줄 리듬을 찾지 못한다.”(p.54)
이 책의 저자인 한병철은 탈시간화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서사와 시간을 엮는다. 나는 이 접근법을 세계 자체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다. 병철이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가속화라고 느끼는 것은 시간 분산의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시대가 겪는 시간의 위기는 다양한 시간적 혼란과 착오를 초래하는 반反시간성Dyschronie 때문이다. 오늘날 시간에는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 그래서 시간은 혼란에 빠진다. 삶이 가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p.15)
그는 “사건들의 더미를 지배하지 못하는 서술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완전히 박자를 잃고 만다.”라며 서사에도 시간적 위기가 닥쳤다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진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사가 시간 위기에 처한 증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기를 치료하는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피로사회에서 그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직접 말했듯이, 그에 눈에 비친 서사의 위기는 사실 위기가 아니라 그저 달라진 시대에 맞는 치료제가 처방된 결과인 것이다.
2
조금 뜬금없지만, 나는 아몬드를 읽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3년 전이었을 거다. 사람은 중요한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까먹는다던데, 내가 아몬드를 줄거리부터 문체까지 전부 까먹은 걸 보면 맞는 말 같다. 저번에 독갤 눈팅을 하다가 한창 아몬드 떡밥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아몬드에 대해서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냥 그러면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는 아몬드가 집에 없고,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냥 아몬드를 읽지 않고 독후감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작품 내부의 요소들은 아예 배제한 채 독후감을 쓰려니 자연스럽게 작품 외적인 요소들로 눈이 갔다. 나는 아몬드를 재밌게 읽고 진심으로 감동하는 사람들이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고 상상해보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기보다는, 그냥 진짜로 내 상상력 부족이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그런 금각사적인 긍지를 가지고 있는 힙스터라는 점 역시 작용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난 궁금해져버렸다. 대체 아몬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 걸까?
쓰고 보니 뭔가 이 윗 문단이 누군가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순수한 미적, 그리고 지적 호기심에서 한 말이지만, 아몬드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불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뭔가 고상한 선비가 대놓고 야만인의 생태를 궁금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한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아몬드가 현대 문학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내가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나의 이런 시도가 오히려 불쾌감을 자아낸다면, 그것은 보리스 그로이스가 문화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면서 예시로 든,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 대중에게서 거부받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세속적 ‘비문화’를 전통과 한 차원에 세워질 수 있는 특별한 혁신적 문화 유형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특권화된 사회계급, 원시 종족 혹은 가치화된 규범에서 심리적/정신적으로 벗어나는 사람들의 문화적 실천을 외부에서 심미화하고 그 문화적 실천을 부정적 순응의 전략을 통해 전통적 전범들과 대조해야 한다. 다양한 하위문화가 가치화된 문화의 차원으로 고양되면, 이렇게 가치화된 재현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통해 재현되는 사람들에게서 차갑게 부정적 반응을 불러낸다. […] 이와 관련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운명은 특히 전형적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러시아 혁명 이후 노동자•농민 대중에 의해 중상中傷이라며 거부되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들의 특별한 문화를 재현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 노동자•농민 대중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화적 입지를 고양해서 폐위된 특권계급과 동일한 문화적 차원에 세우려 했던 것이다.”(p.209)
새로움에 대하여에서 그로이스는 문화의 역동성은 문화경제학적 작동 원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새로운 것은 전통을 긍정적으로 순응(계승)하거나, 부정적으로 순응(혁신)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혁신이란 세속적 공간과 가치화된 문화적 기억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나는 이게 문화의 근원적 원리를 정확히 꿰뚫은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실제로 새롭지는 않다, 다만 새로워 보일 뿐이다.
나는 머릿속에 문화의 구(球)가 그려진다. 우리는 그 구의 한 지점을 콕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어느 한 쪽이 낮이면 어느 한 쪽은 밤이 된다. 가치화된 영역과 세속적 공간의 차이는 낮과 밤의 차이일 뿐, 어느 한 쪽이 절대적인 가치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 해가 지면 달이 뜨듯이. 그렇다면 나는 굳이 아몬드를 현대문학이라고 격상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아몬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나는 아몬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깐 딴소리 좀 하면, 그래서 나는 내 취향이 마이너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굳이 유행을 따라가지 않아도 유행이 나를 향해 오는 것은 오늘의 해가 지면 내일의 해가 뜨는 것처럼 겨우 시간 문제일 뿐이니까. 그 밤이 언제까지 갈지 몰라서 그렇지. 그런데 오히려 유행이 늦게 찾아올수록 나의 취향은 점점 더 선구적이게 되니, 밤이 더 길어져도 나는 상관없다. 어쨌든, 나는 이제 아몬드를 좋아하는 사람의 삶이 더는 궁금하지 않다. 그도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내가 포스트락을 들을 때 그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멜론 차트를 듣겠지만 말이다. 아님 말고.
한병철이 현대 서사를 치료제가 아닌 서사적 위기의 징후로 지목한 까닭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의 시선으로 내일의 일출을 본다. 물론 둘은 꽤나 닮긴 했지만 그 방향이 다르다. 문화의 구를 생각하면, 분명 언젠가 다시 그의 진단이 맞아 떨어지는 시대가 오긴 하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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