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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빈둥대고 똥이나 싸고 있는 나로 돌아오자. 올해 여름이 끝나갈 때쯤 나는 웹소설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의 나에게는 웹소설이나 아몬드나 사실상 같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웹소설이 아몬드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읽어가면 갈수록 ‘서사에 드러나는 시간 형식이 시대적 심리와 연관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웹소설의 내용은 곧 그 작품의 생명이기도 하니, 스포는 안 하겠다. 대신 나는 서사 자체의 시간 형식에 집중하겠다. 웹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기존에 내가 즐겨 보던 작품들의 서사적 형태는 문제발생-수련과정-문제처치-해결완료의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웹소설이 서사적으로 특이한 지점은 여기서 주인공의 수련과정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수련을 묘사하는 내용이 독자에게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분량 낭비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순진하게 파악하면 이것은 수련과정이 묘사될 때 독자들이 고구마식 전개라고 욕을 하니 창작자는 그 수요에 맞춰 독자의 니즈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고구마 현상은, 수련이나 희생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사용하는 시간적 양식이 더 이상 현대 사회에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 당장의 발차기 수련 한 번은 나의 실력을 즉각적으로 올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수련이 축적되면 실력은 점차 늘게 된다. 농사도 희생적 시간 양식 중 하나이다.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솎아내는 그 모든 일은 그 자체만으로 뭔가를 주지 않지만, 앞으로의 수확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런 시간 양식은 미래와의 약속을 기초로 한다. 우리는 미래와 약속하며 현재를 내놓을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며 삶이 점점 예측 가능해질수록, 다시 말해 전면적인 ‘일상화’가 진행될수록, 미래는 사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감각되기 시작한다. 흉년이나 불의의 사고만 봐도 알 수 있듯, 미래는 원래 어느 시대에서나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더욱 심하게 체감하고 있는 듯하다. 병철좌의 말마따나 가장 예측가능한 시대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는 현대인이 더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적 양식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시간적 양식을 다시 수복해야만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그렇다면 문답무용, 오늘날의 서사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보겠다.
엄마랑 같이 빨래를 개면서 잠깐씩 본 드라마가 있다. 제목은 잘 모르겠는데 어느 날 여주인공의 손목에 자기가 죽을 날짜까지의 카운트다운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컨셉이었다. 나는 이게 현대 서사의 해결방법들 중 하나로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여주는 하루하루를 단지 일상화하며 시간적으로 무의미하게 인생을 흘려보낼 터였다. 그런데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이라는 설정은 주인공을 일상에서 건져올려 삶의 의미를 정립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남주와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밀쳐낸다. 그러면서 두 인물은 점차 심리적 거리두기의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이는 한병철이 “드러내고 노출하는 투명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면, 모든 형태의 가상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점진적인 사회의 탈제의화와 탈서사화 과정 역시 모든 가상의 형식을 제거하여 사회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린다. […]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단정적으로 기술한 것과는 대조되는 결과이다.
그는 투명사회에서 가시적인 것을 어떤 타협도 없이 적으로 간주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가시화의 요소들은 위의 드라마에서 죽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인물에게 거리두기의 능력을 가져다주는 등의 협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연극성, 놀이성은 한병철의 예상과 달리 그렇게 인간에게서 쉽게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속적으로 재앙이 이미 도래했음을 경고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지적한 위기들이 점차 새로운 놀이 방식의 창조로 이어질 뿐이었다.
병철이는 “사건들의 더미가 현재 속으로 밀려들면, 서술은 마구 내달려가기 시작한다. 반면에 사건들이 전반적인 무관심과 무차별 속을 부유하면, 서술의 걸음걸이는 둔중해진다.” 라며 서사의 시간적 위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장르적 설정이 얼마나 강력한 서사적 전략인지 모르고 있다. 네이버 토요일 웹툰 2-3 승강장은 언뜻 보면 그의 설명처럼 “마구 내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건들의 더미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서술의 속도와 ‘상관없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며, 동시에 빠른 속도는 사건의 밀도를 높히며 서사적 긴장을 생성한다. 여기서 서사는 난잡함 속의 질서를 찾는다.
또, “사건의 부유”와 “걸음걸이의 둔중함”의 반례로 네이버 화요일 웹툰 위아더좀비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좀비 서바이벌 속의 일상성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활용하여 시공간적 공백을 만들고 그 안에 독자를 자리잡게 해 기묘한 편안함을 준다. 장르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붕 뜬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개해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고, 밉지 않은 캐릭터를 조성해내는 실력 역시 출중하다. 여기에도 부유와 둔중감이라는 통제불가능한 효과 대신 잔잔하지만 두터운, 서사적 주도권을 확보한 안정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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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문학도 아니고 갑자기 왜 웹툰 이야기를 하냐고 해버리면,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현대문학을 안 읽는다. 근데 현대문학은 정녕 똥(안 읽어봄)과 오줌(역시 안 읽어봄)만을 생산할 뿐인가?라는 생각에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문학의 범위에 웹툰을 추가하기로 결정한 거다. 누구 맘대로? 내 맘이다. 어쨌든 나는 한병철의 실패를 보면서 오늘날의 서사는 장르적 요소를 활용하는 것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정말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백년의 고독에 대해서는 마술적 리얼리즘 말고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이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이 현대적 서사의 특징을 가장 잘 예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제 창작자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원래부터 그랬지만, 그동안 우리가 예술작품을 생산할 누군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원래 생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약간 불교적 느낌을 넣어서 말하면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낸 즐거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 이야기를 하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짧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우리가 예술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순전히 그렇게 되기를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오해할 수 있는데, 나는 창작자를 추방하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창작자는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창작자가 필요하지 않은 과정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미학적 상상력이 요구되기야 하지만, 어쨌든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얼마든지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다, 자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말이다.
재독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이는 현대에도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다른 형태로 실현된다. 과거에는 심미적 즐거움을 얻기 위한 대상을 만들어낼 창작자가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같은 ‘작품’을 다르게 들여다보는 재독이 주요한 읽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모두가 아무런 제한없이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기에, 조금만 검색하면 그 창작자와 같은 조류의, 그러나 다른 양념을 쓰는 창작자를 발견할 수 있고, 심지어 추천을 하지 않더라도 알고리즘이 알아서 찾아준다! 그렇기에 작품의 감상 방식은 감상자가 작품 하나를 몇 번이고 재독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작품과 작품을 건너다니며 약간의 미세한 차이를 즐기는 형식이 되었다. 이제는 같은 ‘장르’를 다른 작품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는 작품과 창작자는 장르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줄 창작자는 얼마든지 넘쳐난다. 즉, 그 창작자가 꼭 ‘내’가 되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레고 만들 때 딱 하나만 있는 부품이 안 보일 때 다급해지는 거랑, 부품이 차고 넘쳐서 하나 없어져도 모르는 상황을 비교해보면 쉽다. 우리는 이제 작품과 창작자를 엮어 볼 필요가 없다. 창작자는 단순 부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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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 특정한 작가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그가 가진 아이디어의 총체적 승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미술관 같은 형태의 보편적 아카이브 시스템을 통해 그 작가에 대한 정보가 보존되고 확산되는 방식을 통해 남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작가의 아이디어가 사회에 의해 진리로 인정되는 것은 그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작가에 대한 실존적 위험이 된다. 그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확산됨으로써 그 가치를 상실하고 역사적 기억의 체계 속에서 그 저자의 고유한 자리가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특정한 아이디어가 진리가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하더라도, 그 독창성이 인정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기억에서 삭제되지 않는다. 오늘날 특정한 이론과 방법의 성공•실패 여부는 오로지 그 이론과 방법이 문화경제 속에서 다른 이론 및 방법과 어떠한 관계인가로만 측정되지, 유토피아적이고 문화 외적인 현실에 대해 어떠한 관계인가로 측정되지 않는다.” (p.59)
그는 모든 문화적 생산물은 문화 내적으로 변화할 뿐, 문화 외적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경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금 자체의 가치를 0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동시에 황금과 돌을 같은 가치로 규정하는 이 문장은 문화적으로 기억될 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으로 문화사는 문화 바깥에 영향을 주지 않고 문화 내부의 가치들을 뒤바꾸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화적 행위도 문화 외적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행위 자체가 그것이 문화적으로 성공했다 할지라도, 문화 외적 현실에 실천적인 영향을 줄지의 여부는 완전히 미지수라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과 창작자를 엮는 해석은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문화 내적 요소를 고려하는 해석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 어떤 문화 외적 현실의 반영도 아니다.
즉, 문화적 계몽은 문화 외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이상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 한국 문학이 점점 계몽적으로 변할수록 지루하고 거북하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형태가 되어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문화 내적 요소들을 가지고 외적 현실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그러나 문화는 애초부터 문화 내적 요소들의 축제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대 문학은 이런 축제를 깽판내고 있는 셈인가? 그것은 아니다. 밥상을 엎는 것과 밥경찰만 식탁에 내놓는 것은 다르다. 그들의 계몽적인 지적은 결국 문화 내적 요소는 외적 현실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를 깽판낸다기보다는 그냥 볼거리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학이 계몽적 태도를 유지한다면 문화는 그런 무의미한 노동에 시들고 볼품없어질 것이다. 문화는 결코 파멸되지 않지만 다만 중요하지 않게 될 뿐이다.나는 한국 문단이 최소한의 통찰력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순문계가 장르적 요소들을 마음껏 사용하며 서사적 위기에서 요리조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문학의 형태는 몰락해도, 문학은 결코 몰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읽은 책: 보리스 그로이스 – 새로움에 대하여, 한병철 –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 가브리엘 마르케스 - 백년의 고독.
웹소설: 화산귀환, 역대급 영지 설계사, 나노마신, 전지적 독자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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