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들이 약탈을 한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고 계엄령까지 내려진 도시에서 전기와 산소와 같은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가는데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환자들을 돌보던 이 ‘전문 의료인’들이 내린 ‘치명적인 선택’은 문제를 ‘재난의 대응과 대비’에서 철학적인 주제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도 논쟁적인 ‘안락사와 생명 윤리’로 확장시켰다. 과연 누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문제의 핵심은 워낙 많은 경우가 있고 또한 그 각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제 어머니였다고 해도, 저는 그 사람들더러 그렇게 하라고 말했을 거에요’ 대중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 경우,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이’ 어머니, ‘이’ 아버지, ‘이’ 아저씨, ‘이’ 할아버지, 즉 지금 여기 있는 ‘이’ 누군가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주사를 맞아야만, 사람들이 더 이상 ‘나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p.396) 즉, 내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사례만 해도 뇌사 판정을 받았으나 오랜 치료의 시간 끝에 회복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케이스와 미처 안락사와 관련한 의사를 미리 표시해두지 않은 채로 코마 상태가 된 환자라던가 언어장애 등으로 그 의사를 명확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나 태아의 낙태와 같은 다양한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선택의 결정은 ‘절대적으로 비가역적이며 최종적’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내려져야만 한다. 사유는 생명의 가치는 과연 동등한가와 같은 또 다른 심오한 철학적 문제로 뻗어간다. 제한된 자원에서 치료를 받을 환자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은 서로 동등한가? 동물의 생명은 사람의 목숨과 동등한가? 애완동물과 식용동물의 생명의 가치는? 동물과 식물은? 만약 그 가치가 차별적이라면 그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비록 그 어떤 분배 방법도 보편적 동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어떤 과정을 고안하는 과정 자체는 좀 더 정의로울 수 있었다. 장기 이식의 경우, 의사와 일반인 모두가 결정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정의와 효율 양쪽의 혼합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진료의 분배를 결정하는 사람이 특히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그 핵심에 도덕적 우선순위가 놓여있기 때문이다.”(p.195) 그리고 “부상자 선별과 의료적 배급은 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p.189) 그리하여 이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와 같은 자유론 및 공리주의와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로까지 확장된다. “재난 상황에서의 목표는 반드시 ‘최대 다수에게 최대 이익’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서 ‘최대 이익’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생명을 건진 사람의 숫자인가? 생명을 건진 사람의 여생의 합계인가? 생명을 건진 사람의 여생의 합계 중에서도 ‘질적’으로 최상인 경우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p.193) 과연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양 또는 불행의 정도를 비교하거나 더하고 뺄 수 있는가? “이 세상에는 고통의 합계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에 우리가 도달 했을 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매우 끔찍한 뭔가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주 안에 존재 가능한 모든 고통에 도달한 셈이 된다. 우리와 마찬가지인 수백만 명의 고통을 더해봤자, 우리의 고통이 더 늘어나지는 않는다. - C. S. 루이스 ”(p.194) 즉 이런 철학적인 문제와 관련된 의사 결정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타당한 검증과정을 사전에 충분히 거쳐서 합의점을 도출해야 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사태를 통해 드러난 미국 사회의 야만성 또한 엽기스러운 수준이다. BLM 사태를 비롯해 무슨 사건만 터지면 폭도들에게 가게들이 약탈당하는 미국의 민도는 카트리나가 덮친 도시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총기가 자유화된 사회에서 폭도에 대한 유언비어에 가까운 소문은 마른 벌판에 불붙은 듯 퍼져나가 시민 서로 간에 불신을 조장했다. 미국 사회 내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의 역사와 인종간의 빈부 격차 또한 수재민 대부분이 흑인이었다는 데에서 잘 드러났다. 병원이 침수 및 단전 당했는데도 예약 진료가 있다며 수영해서 왔다는 여성 외래 환자의 이야기는 이게 유머 모음집인가 싶다. 체중이 170kg이거나 무려 270kg에 달해(p.646) 이송이 꺼려질 정도의 비만 환자는 과연 병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기 관리의 문제인가. 집에 두고 온 애완동물이 걱정되어 환자 진료조차 제대로 못하는 의사와 병원으로 대피하면서 수많은 애완동물을 데려온 병원 직원 가족들과 병원으로 대피하려는 “불안정한 보트에 타고 오염된 물 위를 배회하는 갓난아기를 거부”하는 병원 사람들의 대비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혹시 아끼는 애완동물들을 안락사 시키다 보니 감각과 이성이 마비되어 환자에게도 동의 없이 안락사를 시행한 것은 아닐까? 안락사가 한창 진행될 때 반대의사를 표시했던 가톨릭 신자 의사가 바로 애완동물이 걱정되어 진료조차 제대로 못해 동료 평가가 좋지 않던 의사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 걸까. 게다가 재난 동안 내내 병실에서는 산소가 부족하여 야단이 났는데 어떤 병원직원은 에어컨 가동도 중단되어 너무나도 더운 나머지 산소를 이용해 더위를 식혔다는 어이없는 증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두절된 줄 알았으나 메모리얼 병원의 암센터 건물에서는 계속 전기가 공급되었고 그 사실을 발견한 병원 CEO는 그저 자신과 주변인의 편의를 위해 그 사실을 다른 직원에게 알리지 않고 단지 병워 고위층의 휴게실로만 이용했기까지 했다. 재난 후 닥터 존 틸에게 일어난 아이러니 또한 소위 의료전문가들의 이중적인 태도의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재난 중에 모르핀 내성이 있어 주사로는 도저히 기분이 나아지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환자에게 친히 수건을 이용해 기분이 나아지게 했던 닥터 존 틸은 재난의 시간이 지나고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온 직후 뇌졸중을 겪었고 언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고 의사 자격을 잃게 될지 너무나도 전전긍긍하며 걱정한 나머지 전이성 대장암 말기에 이르고 말았다. “복부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감염 증세가 나타나 혈액으로 번졌던 것이다. 무려 다섯 번이나 수술실로 실려 갔고, 수혈을 받고, 진정 작용을 위해 계속 프로포폴을 맞은 상태에서 몇 주일 동안이나 대부분 무의식 상태로 누워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폐 전문가인 틸이 심각한 호흡 문제를 겪는 바람에, 기관절제술로 자기 목과 연결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ICU에 누워 있으니 말이다. 이제는 틸의 아내가 남편의 위중한 상태에 관해서 경고를 들었고, 연명 중단 의향에 대한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느 면으로 보나, 틸이 생존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으며, 설령 생존한다 하더라도 두뇌와 다른 주요 장기에는 상당한 손상이 불가피해 보였다. 틸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원하는 바는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최대한 강도 높은 치료를 받는 것이었다. 틸이 반의식 상태의 림보에서 몇 주일 동안 머무는 사이 그는 주위 사람들과 거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그늘 속에서 한 달을 보낸 다음에도, 틸은 메모리얼에서 주사를 놓았던 사람들과, 이들을 도왔던 자기 자신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틸은 ICU에서 생존 가능성이 낮음을 보여주는 징후를 거의 모두 드러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겪은 문제는 잠재적인 역전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p.585~587, 거의 전문을 발췌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옮겨 적으면서도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데 이 독후감을 읽는 사람 역시 이 분노를 같이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메모리얼에서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140kg의 환자 역시 제일 마지막에 탈출하여 끝까지 살아남았고, 다른 병원에서 허리케인으로 고립되었던 270kg에 달하던 환자 역시 “어느 누구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이 모두 대피한 다음, 엘리베이터가 다시 가동될 때까지 주 방위군 병사들이 며칠 동안 연료를 가지고 열세 줄의 계단을 지나 올라왔고, 덕분에 환자의 생존을 위해 보조 발전기를 계속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p.647)) 게다가 다른 동료 의료 전문가들은 기소를 위해 체포된 애너 포를 위해 “만약 기소가 이루어진다면 의료전문가들이 뉴올리언스를 떠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결국 포의 지지자들은 이번 쟁점에서 자기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환자를 버려두겠다고 위협하는”(p.588) 행태를 보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얼마 전 있었던 의사파업과 수술실 CCTV 설치에 관한 특정 집단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질문은 다시 이것으로 돌아온다. “병원과 요양원에서 발생한 사망은 단순히 자연재해, 혼란스러운 정부의 대응, 빈약하게 건설된 홍수방지대책, 좋지 않은 생활환경이 중첩되며 만들어낸 유감스러운 결과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개인 및 기업의 탐욕에 대한 느슨한 관리 감독도 한몫 했을까?”
결과론적이긴 이야기긴 하지만 같은 시기에 메모리얼 병원 인근에서 비슷하거나 더 열악한 상황이었던 공립 채리티 병원이 보여준 대처는 메모리얼에서 내린 판단과 대처가 결국 옳지 않았다는 반증을 보여준다. “전력도 끊어지고 상하수도와 컴퓨터와 전화와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았다. 헬리콥터 착륙장도 없었다. 환자의 숫자는 메모리얼의 두 배 정도 됐으며 9월 2일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이곳에 있던 모든 환자를 이송할 수 있었는데 메모리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9월 1일 목요일보다 하루가 더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망한 환자는 겨우 3명뿐이었다.(메모리얼에서는 총 45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유언비어로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본 사실이 아니면 아무 말도 마세요.”라는 조치가 시행되었고 “가장 중요한 차이는 채리티의 지도자들은 이 환자들 가운데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구조가 불가능한 부류를 굳이 골라내지 않았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가장 위중한 환자는 맨 마지막이 아니라 맨 처음 내보냈다.”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
당신과 소중한 사람이 의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경우 메모리얼을 이용하고 싶은가 아니면 공립 채리티 병원을 이용하고 싶은가? 나라면 두 번 잴 것도 없이 채리티를 선택하겠지만 말이다. 재난 대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알고 있어야하는 대전제가 바로 이런 내용이다. “시스템은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공식 대응은 항상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느리다. 조정과 소통은 특히 어렵다. 처음 몇 시간이 재난에서 특히 중요한데, 삶과 죽음의 운명은 재난을 당한 공동체의 대비태세나 자원, 능력에 특히 의존하기 마련이다. 자기네 구성원은 물론 인근의 다른 구성원까지 도울 수 있는 힘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도움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안전하기 마련이다. 결국 시스템이 갈라지고 무너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큭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 행동과 결정은, 재난 중에 개인이 행한 행동과 결정이기 마련인 것이다.” 나 역시 재난 대비는 평소에 최대한 해두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재난 대비를 너무 과하게 해서 생존주의자/프레퍼처럼 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시나리오야말로 재난일 테니까. 그러나 나 자신이 그런 상상 이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자기네 구성원은 물론 인근의 다른 구성원까지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최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만을 소망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재난이란 끔찍한 압력 하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우리가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최소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싶은지 미리 한번 생각해보는 ‘사치’를 누릴 수는 있”으니까.(p.647) 한번쯤은 생각해보자. 그리고 “뭔가 잘못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떻게, 왜, 누가 결정한 것인지 모른다는 거죠. 하지만 그들은 대답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 결정이 무엇이든 간에 여러 가족이 누군가를 잃었으니까요.” 같은 대답 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여기까지 읽어준 사람들은 내가 “예외적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도덕규범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깊은 헌신을 보일 기회”(p.624)라며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네가 바라지 않는 행위를 타인에게 행하지 마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황금률이다. 즉, 무언가 끔찍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맑은 정신인 상태에서 역지사지를 해보자는 것이다. 제발. 재난 같은 특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모든 이의 삶과 죽음의 책임은 오롯이 그 삶과 죽음의 주인인 그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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