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성호 이익은 조선후기 실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성호학파는 실학이라고 불리는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문 사조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물론 조선후기의 실학 계열은 성호학파뿐만 아니라 노론 낙론계의 북학파, 소론계 등이 있었으나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정약용이 성호학파로 분류되는 것을 볼 때 성호 이익은 조선후기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성호 이익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였고, 주자를 고평가했다. 그러나 부친인 이하진이 윤휴와 가까운 사이였고, 송시열계와 대립한 것을 볼 때, 이익은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주자절대주의 학풍에 회의를 품고 여러 경전을 통해 사서를 해석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성호의 관심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 문제, 역사학 등으로 넓혀져 갔다. 기본적으로 당시 주류였던 노론 계열이 균부균세를 이념으로 내세우며 부세제도의 이정을 통해 민생 안정을 꾀했다면, 성호는 반계 유형원의 균전 개념에 공감하여 토지개혁을 통해 민의 생활기반을 보장해주는 쪽의 민생 안정책을 꾀하였다. 비록 그의 한전론은 후대의 정약용의 여전론처럼 본격적인 토지개혁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민의 생활기반 확보를 최우선순위로 두었다는 점에서 반계 유향원의 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호 이익은 역사관에서도 기존 성리학자와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성리학에서는 화이관을 바탕으로 금이나 원같은 이민족 왕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성호는 제자 안정복과 역사에 대해 토론하는 도중 원을 정통왕조로 보아도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오히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기존 성리학적 화이관에 입각한 역사관을 보이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성호의 사상이 근대를 지향하고 있었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동전의 유통과 상업 발달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자연관 역시 기존 성리학의 자연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성호가 보인 주자상대화 경향과 박학 경향은 안정복, 권철신,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조선후기 국가재조론의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 기존 지배 이념인 주자절대주의가 그 효용을 잃어 가고 있었을 조선후기에 분명 성호의 학설과 사회개혁론, 학풍은 새로운 가능성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들도 사실상 성리학자였기에, 근대를 지향하는 이념을 찾기는 어렵지만 성호와 성호학파의 지향은 유학의 민본이념을 더욱 구체화하고, 주자절대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능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했는데, 안타깝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