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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의 구성에 대해
<나의 팔레스타인 이웃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 요시 클라인 할레비(Yossi Klein Halevi)는 1953년 미국에서 태어나 1982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유대인 저술가이자 평론가이다. 옮긴이 유강은 씨에 따르면 할레비가 고작 열 네 살일 때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겪고 있었고,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 이스라엘을 찾아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유대인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이스라엘 이민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 극우 시온주의 단체에 가입한 이력이 있었으나, 이스라엘 군대에 징집되어 ‘점령’의 잔혹함을 경험하고 태도를 바꾼다. 그때부터 그는 이스라엘 우익 세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시온주의자이자 충실한 이스라엘 시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친필레스타인-반시오니즘 입장의 독자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할레비의 텍스트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책의 ‘대부분’이라 서술한 것은 책의 에필로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이웃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할레비의 다소 편향적인 주장들에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진영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진영이 서로의 주장을 경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 이 독특한 구성이야말로 <나의 팔레스타인 이웃에게 보내는 편지>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누구인가?
할레비가 이 책에서 알려주는 정보 중에 가장 유용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혈통만으로 정의되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들은 주장 하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 - 유럽 출신 유대인 - 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후손이 아니라 중세 하자르족 - 이 투르크 종족의 왕은 많은 백성과 함께 서기 8세기에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 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는 역사적 정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하지만 설사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유대인이 하자르족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정통성이 영향받는 건 아닙니다. 개종자든 타고난 유대인이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대 민족과 신앙에 자신을 맡기는 순간 소급 적용되어 그 기원, 그러니까 최초의 유대 개종자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연결되는 것이니까요.” (31~32페이지)
할레비의 정의에 따르면 유대인은 일종의 민족종교 (ethnoreligious) 집단이다. 특별히 유대인의 ‘핏줄’을 타고나야 유대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유대교로의 개종 과정을 거친 모든 사람은 다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아랍인이 고대 유대인의 DNA을 보유하고 있고, 반대로 어떤 유대인(유대교도)이 고대 아랍인의 DNA를 보유하고 있을 시, 유대인들은 후자의 경우만 동족으로 규정하고, 전자의 경우는 자신들과 다른 민족으로 본다.
(주: 아랍인의 경우는 다르다. 아랍 민족은 종교적 개념으로 정의되는 유대 민족과 달리 ‘언어적’ 개념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슬람교가 아닌 기독교를 믿어도, 아랍어를 사용하고 자신을 아랍인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아랍인이다.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도 대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과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연합전선으로 수행되었다.)
유대인의 조국은 무엇인가?
할레비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 투영하고 있다.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이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이스라엘 영토 + 가자 지구 + 요르단강 서안 지구 (이 영역은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 보호령 시기의 영토와 일치한다)’를 일컫는다. 해석에 따라 이스라엘과 시리아와의 분쟁지역인 골란 고원 역시 포함될 수 있는데, 저서에서 이 부분은 명확히 서술되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자신은 유대교도로서, 고대 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조상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세에 의해 쫓겨난 그 조상들의 후손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귀환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인 ‘시온주의(Zionism)’의 성공을 통해 200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므로’, 유대인은 해당 지역에 정당한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파 시온주의 운동인 ‘베타르’의 단원들)
유대인에게 배당된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도 견해가 갈린다. 저자는 청소년 시기에 우파 시온주의 운동인 베타르(Betar)를 지지하면서 유엔의 유대-아랍 분할안을 반대하고 지금의 요르단 왕국이 된 지역까지 유대민족의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17~118페이지). 이런 생각은 그가 성장하면서 서서히 바뀌게 된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에서 배포한 포스터. 요르단 강으로부터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반면 아랍인들과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베타르의 주장과 정반대로, 현재 이스라엘국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땅까지 모두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이 팔레스타인 보호령으로부터 철수할 때인 1948년에는 더더욱 첨예한 문제로 여겨졌다.
유엔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분할안을 급히 제시했으나, 아랍 국가들은 물론이고 강경 시온주의자들 역시 이와 상관없이 전쟁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독립 전쟁, 혹은 재앙
결국 1948년에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고 만다. 전쟁의 결과 팔레스타인 사람 7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아랍 측에서는 이를 두고 시온주의자들의 조직적인 인종청소라고 주장한 반면, 시온주의 측에서는 아랍 지도자들이 아랍 군대들이 곧 승리할 것이니 집을 포기하라고 부추겼다고 주장했다(120페이지).
(주: 1948년 전쟁에 대한 양측의 용어도 상이한데 이스라엘 측에서는 이 전쟁을 ‘이스라엘 독립 전쟁’으로 기념하는 반면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알 나크바(재앙)’이라는 아랍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할레비는 두 서사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우선 난민들이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이스라엘 역사학자들’(주: ‘New Historians’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역사학계의 수정주의 조류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 중 주요 저작이 한국어로 자주 번역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일란 파페가 있다.)로부터 입증되었으며 추방 명령이 없었다는 말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1948년 전쟁 중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폭로한 역사가 일란 파페와 그의 대표작 ‘팔레스타인 비극사’. 파페는 이스라엘 국적으로 태어났으나, 자국을 비판하는 역사서를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국외추방자 신분이다.)
(1948년 전쟁 이후 폭발한 예멘 아랍인들의 반유대주의 정서와 탄압 때문에 이스라엘로 망명하는 예멘 유대인들.)
하지만 할레비는 유대인이 1948년의 이야기에 범죄자로 등장하는 것은 거부(122페이지)하고 있다. 이는 친팔레스타인적 서사가 1948년 이전까지 아랍 사회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던 유대인들 역시 전쟁 도중 일어난 반유대 폭동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스라엘로 이주해야 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서 아랍인에 대한 폭력이 존재했다면 다른 아랍 나라들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윗에서 골리앗으로 만든 ‘6일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더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1967년의 6일 전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쫓아낸 것(130페이지)을 빌미로 ‘포위된 국가’의 ‘선수방어’라는 논리를 내세워 선제공격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아랍 군대는 6일만에 항복했고 전쟁 이름도 ‘6일 전쟁’이 되고 만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실질지배 영토는 서쪽으로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부터 동쪽으로는 요르단 강 서안 지구까지 확장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승전국으로, 그것도 전보다 몇 배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승전국으로 등극했다.
(주: 시나이 반도는 훗날 이집트의 대이스라엘 온건파 사다트와의 협정으로 이집트에 반환하여 현재는 이스라엘의 통제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군사적 성공은 자연스레 ‘다수의 아랍 국가에 대항하는 하나의 유대 국가’라는 국제적 인식을 종식시키고, 이스라엘 정부를 잔인한 점령 정책의 가해자로 만들었다.
유대인 정착촌 문제
지금까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정착촌 만들기 운동’ 역시 이 때 시작되었다. 서안 지구에 속하는 주요 도시 헤브론으로 이어지는 도로상에, 시온주의자들은 첫 ‘유대인 정착촌’ 크파르 에치온(137페이지)을 건설하기 위한 삽을 떴다. 할레비의 주장에 따르면 해당 지역은 1948년 전쟁 당시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가 있던 곳으로 “근대에 존재했던 유대인 공동체를 복원한 것(138페이지)”이었다. 그래서인지 첫 정착촌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큰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6개월 뒤, 시온주의자들은 헤브론 시로 진격했다. 헤브론은 유대 경전에서 예루살렘에 이어 두번째로 신성한 도시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의 헤브론은 누가 보아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밀집 거주하는 아랍 도시였기 때문에, 과연 성경에 근거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논쟁이 이스라엘 본토에서 벌어졌다. 할레비는 이 지역도 크파르 에치온과 마란가지로, 1929년에 아랍 민병대에 의해 학살된 근대적 공동체를 복원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139페이지).
그러나 할레비의 생각이 어떻든 정착촌 운동과 그에 따른 시온주의자들의 아랍 지역 점령은, 1948년의 대규모 인종청소 이후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던 두 민족의 피튀기는 민족 분규를 다시 불러온 책임이 있다. 시온주의자들이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을 유대민족의 성스러운 귀환이 아닌, 중동을 지배하고자 하는 식민주의자들의 추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6일 전쟁이 불러온 PLO의 무장테러노선
또한 1967년 전쟁은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자체적 기구인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6일 전쟁에서 이집트와 요르단 모두 공세적인 이스라엘군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영토를 보호하지 못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PLO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이 기세를 몰아 적극적인 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1970년 PLO 산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의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 승객들은 결과적으로 전원 생존했다.)
당시 PLO가 즐겨 사용하던 테러 방식은 9.11 테러나 최근 세계 각지에서 자주 발생하는 자살폭탄테러와 다른 방식으로, 하이재킹한 비행기에서 이스라엘 및 서방 국적의 성인들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주: 해당 하이재킹 사건 이후 요르단 정부와의 사이가 내전까지 벌일 정도로 틀어지면서 지원세력이 줄어든 PLO는 뮌헨 올림픽 도중 이스라엘 선수단 일부를 살해하는 등 더 과격한 방식의 테러를 저지른다.)
70년대 이스라엘의 정치 판세 변화
이스라엘의 ‘좌파’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노동당은 이 상황을 목도하면서 더이상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는 정착촌 운동에 어느정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1970넌대 초반 내내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촌 건설은 최소한으로 억제되었다(140페이지).
그러나 1975년 11월 10일 유엔이 찬성 72표 / 반대 35표 / 기권 32표로 시오니즘을 일종의 인종주의라고 선포하자 (이는 공산권과 이슬람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냉전에서 서방측이 승리하면서 해당 결의안도 폐기되었다), 수많은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감정적으로 동요되어 우파 리쿠드당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집권 당시 승전했음에도 계속 떨어지는 노동당의 의석 수)
할레비 역시 당시 분위기에 휩쓸려 유대 정착자들의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했으며, 1984년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된 헤브론 거리에서 열리는 유대교 행사를 취재하러 가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취재는 할레비가 정착 운동과 거리를 두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유대인들이 통금 조치를 내려 팔레스타인 이웃을을 몰아낸 채 거리에서 치켜든 토라 두루마리에서 “우리가 이집트에서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고, 따라서 이방인을 공정하게 대하라’라 적힌 문구를 보았기 때문이다(146페이지).
“점령은 무조건 끝나야 한다”
토라의 지시를 무시했기 때문이었을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훗날 ‘1차 인티파다’라고 불리게 되는 조직적 저항운동을 펼친다. 할레비는 1차 인티파다가 최고조에 이르른 1989년, 이스라엘군에 징집되어 가자의 난민촌으로 파견되었고 직접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치하는 점령군이 되어 보았다(147페이지). 여기서 할레비는 점령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야외 시장 근처에서 누군가가 군인들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수류탄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노점을 모두 폐쇄하라.’ 우리는 노점상들에게 장사를 접으라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나이 든 신병이었는데, 우리하고 똑같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나온 이 남자들 앞에서 같은 아버지로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걸 알아채자 노점상들이 우리 말을 못 들은 척 했습니다. 그런데 장교 한 명이 나타나더니 아무 말 없이 레몬을 파는 노점으로 가서는 모조리 땅에 엎어버렸습니다. 시장은 문을 닫았지요.” (148페이지)
이때부터 할레비는 점령은 무조건 끝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 오슬로 협정
때마침 90년대 초 PLO의 무장투쟁을 지원하던 소련이 붕괴되고 같은 시기에 상대적 유화파인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당선되었다. 라빈과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면서 오랜 분쟁에 마침표를 찍을 것처럼 선전했다. 할레비는 아라파트의 전적 때문에 협상 성사의 가능성을 반신반의했지만 새 정부의 결단을 우선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라파트가 199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모스크에서 자신은 평화를 이룰 생각이 없으며 그저 현재 팔레스타인의 힘이 너무 약해 평화협상에 들어간 것이라고 연설하자, 할레비는 아라파트가 협정을 “유대 민족의 주권이라는 꿈을 끝장내는 해법의 전주곡으로 써먹었”으며 “이스라엘이 양보를 할수록 테러만 많아진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154페이지)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당시 아라파트의 발언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것 뿐이라고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오슬로 협정 자체가 팔레스타인 측에 불리하게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협정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경계를 바탕으로 구역을 A, B, C로 나눠 일부분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도록 했다. (당신은 저 사진을 보고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력이 닿는 구역인지 확인할 수 있는가..?)
설상가상으로 협정을 체결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마저 1995년 12월 유대인 극우주의자에게 ‘민족의 배신자’로 몰려 암살당하면서, 평화는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극우 시온주의자에게는 아랍인의 제한적 통치조차 허용할 수 없는 선이었다.
할레비식 협상 제안
저자 할레비에게 있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식민주의자와 토착민의 충돌이 아닌 권리와 권리의 싸움(155페이지)이다. 그는 분할된 이스라엘(여기서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영토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포함한다)은 유대 민족이 자기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야 하는 두려운 일(160페이지)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백 년 동안 존재를 걸고 싸운 두 민족이 ‘한 국가 해법’으로 공동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처럼 비극으로 끝날 뿐이라는(163페이지) 현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방법은, “1948년의 이스라엘 창건을 팔레스타인이 받아들이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이 1967년에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는 것”(173페이지)이다. 그뿐만 아니라, 할레비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의 개념이 협소하게 정의되어야 (주: 예를 들자면 1948년 이스라엘의 도시 야파에서 쫓겨난 난민이 지금 팔레스타인의 도시 라말라의 살고 있다면, 그가 난민 신분을 인정받아 야파에 거주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다) 평화가 이루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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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요시 클라인 할레비가 팔레스타인 이웃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한편 책의 에필로그(253~328페이지)에서는 그에게 답장을 보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편지를 싣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답장을 보냈고, 분쟁의 성격상 익명이나 성 없이 이름만으로 기재된 편지도 있다. 나는 그 중 할레비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몇 가지 의문들을 풀어주는 문장 몇 개를 엄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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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전쟁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생략이나 오독은 아니지만 노골적으로 부정직한 겁니다(죄송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67년 전쟁의 진실을 알지 못하다니 정말 믿기 어렵군요. 지난번 편지에서 이스라엘 장군과 정치인들의 말을 충분히 인용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만 인용해보겠습니다.
다음의 말들을 보시죠.
모르데하이 벤토프(Mordechai Bentov): “절멸의 위협이라는 이야기 전체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고안된 것이었고, 새로운 아랍 영토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에 과장된 것이다.”
마티 펠레드(Matti Peled) 장군: “국경에 결집한 이집트 군대가 어쨌든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런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의 지적 능력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이라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군에 대한 모욕이다.
모르데하이 호그(Mordechai Hod) 장군: “16년 동안 우리은 개전 직후 80분 동안 벌어질 상황을 계획했었다. 우리는 그 계획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 생활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우리는 그 계획을 다듬는 일을 중단한 적이 없다.
(중략)
제 생각에 유대 민족의 고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구입니다. 한시바삐 모든 만족이 지구를 으뜸가는 고국으로 여기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부족에 속한다면, 그만큼 빨리 우리는 평화와 상호 이해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도저히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건가요?”
- 수비 씨의 편지 중 일부 발췌
6일 전쟁이 이스라엘의 자기방어라는 관점은 서방에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당시까지 이스라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공산권 국가들도 (대표적으로 유고슬라비아가 있었다) 이 전쟁을 구실로 이스라엘과 단교했으며 이후 골란 고원의 무기한 점령으로 인해 작전 자체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유대 민족의 고국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지구라는 말은 다소 공상적이긴 해도 분명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다. 양측이 처음부터 조금만 더 타협했다면 대규모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할레비가 자신의 편지에서 ‘한 국가 해법’을 반대하는 이유로 언급한 유고슬라비아 분쟁도 티토의 사망 후 생겨난 권력 공백이 없었더라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몰랐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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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에 관해서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중동의 한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이 재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이다. 그 사람들에게 시온주의가 유럽의 식민주의 운동이라고 말해보라. 아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947년 이스라엘이 수립되기 직전, 유대인이 소유한 토지의 절반은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과 팔레스타인유대인식민협회(Palestine Jewish Colonization Association) 두 기금이 소유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최대의 은행인 레우미은행(Bank Leumi)은 원래 이름이 유대식민신탁기금(Jewish Colonial Trust)였지요. 초창기 팔레스타인 유대인 이민자들이 ‘식민지’나 ‘식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례는 그 밖에도 많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식민주의자’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원스인어와일(주: 사람 이름이 아니라 닉네임이다.) 씨의 편지 중 일부 발췌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정착자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로 정의하는 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정착자 식민주의란, 본국의 관리를 보내 식민지의 원주민 위에 군림하는 대신, 본국의 사람들이 본국과 독립된 일종의 ‘정착자’가 되어 원주민의 자리를 대체하려 하는 형태의 식민주의를 뜻한다.
정착자 식민주의의 대표적 예시로는 유럽계 미국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남아공 아프리카너(보어인) 정착자들의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 정책 등이 있다.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언론은 이 중 특히 남아공의 사례를 거론하며 ‘아파르트헤이트 국가(Apartheid state)’의 폐지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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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아름답지만 이미 다른 남자랑 결혼한 사이다”라는 악명 높은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헤르츨 자신은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을, 자신이 보호하려고 애쓰는 유럽 유대인과 똑같은 희망과 공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해걸해야 할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 점과 관련되는 헤르츨의 말을 인용해보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에 있는 사유지를 점잖게 몰수해야 한다. 무일푼의 사람들이 국경 밖으로 나가게 부추겨야 한다. 과도적인 나라들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고용을 거부하면 된다. 자산 소유자들은 우리 편으로 넘어올 것이다. 몰수와 빈곤층 추방 과정은 굴 다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민족운동이 유대 민족의 구원과 대속을 추구한다고 공언하면서 마뜩지 않은 ‘무일푼의 사람들’을 커다란 문재로 가루고? 그들의 땅을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 ‘몰수’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민족운동에 대해 헤르츨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 요르단의 좀 먼 이웃(주: 익명으로 작성되었다.)이 보낸 편지 중 일부 발췌
(근대 시온주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
‘시온주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의 대표작 <유대 국가>를 읽어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유럽을 위해 우리는 거기서 아시아에 대항한 장벽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이며, 야만에 대항한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유대 국가>, 테오도르 헤르츨, 도서출판b, 49페이지)
그가 유럽인으로부터 타자화되는 유럽 유대인의 고통을 이해하긴 했지만, 유대인으로부터 타자화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고통을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집단에 의해 지배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개인적인 감상
나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 따라서 내 지극히 개인적인 평을 내리자면, 할레비의 주장 상당수는 의뭉스러워 보였고, 몇 가지 서술은 불쾌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비록 그가 이스라엘 우파를 반대하고 평화를 원한다고 누누히 말해왔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 우파의 비역사적 주장을 반박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착촌의 철거와 분쟁의 종식을 원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단순히 시온주의자의 프로파간다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책을 끝내지 않고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답장을 책에 그대로 실으면서 두 분쟁 주체 간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놓고자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갤러리에 올리는 첫 감상이라 부족한 부분도 많고 오탈지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래도 너그럽게 읽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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