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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반대로 뒤집힌 지하수기

지하수기는 자신의 관념에 대해 설파하는 1부, 그 관념이 세상과 부딪힌 경험이 담긴 2부로 나뉘는데 이 2부 구성이 작품 전체의 핵심이라 할 정도로 중요함.

골목 안은 반대로 초중반부 까지는 골목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과 사건들에 대해 집중해서 서술하다, 후반부 학부모 회의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의식을 토로하는 방향(그리고 그 의식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귓동냥으로 알게된 거짓된 의식임) 으로 전개됨.


이렇게 보면 둘의 차이점이 극명한데 도끼는 자아가 먼저 존재하고 이 자아가 세상과 부딪히며 오롯이 설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면(그리고 이는 지하수기의 2부가 시간순으로 앞선다 하더라도 그 서순이 뒤집힌 구조 탓에 더 극명하게 드러남. 미학적 성취라 할수 있지)

박태원은 반대로 현실의 자잘한 사건들이 의식을 형성해가는 모습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음.



박태원이 의식을 바라보는 방식은 서구의 관념 작가들과 비교하면 뚜렷하게 알 수 있는데, 조이스든 프루스트든 톨스토이든 항상 자아를 전제하고 의식을 전개한다면 박태원은 이 자아의 탄생 자체를 새롭게 해명하고자 함.

이는 각자의 출신 국가가 가진 역사적 특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신적 유산이 빵빵한 유럽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쉽지만 박태원처럼 식민지 출신의 작가라면, 그것도 전통과 신문물 사이에서 방황하던 존재라면 그런 방식의 사고는 힘들 것 같음

그래서 박태원의 의식의 흐름은 조이스나 프루스트와 비교하면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받아들인 정보와 디테일에 치중됨. 스티븐처럼 해변에서 뛰어댕기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를 뒤섞고 셰익스피어로 자신의 미학을 다지거나, 잃시찾의 화자처럼 가정부 하나를 서술하고자 박물관의 온갖 미술품을 떠올리는 건 박태원에게 힘든 일임. 그럴 수 있는 유산이 없으니까.



이런 경향은 초기작인 《낙조》에서부터 볼 수 있는데, 작품내내 화자가 얘기하는 건 자신의 과거 경험임. 식민지 초기라 아직 혼란하고 이래저래 아무것도 모르는 염상섭 식의 행동 중심의 세계에서 서서히 이에 익숙해지면서 현실 자체를 재고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는 거지.

결국 이는 작품의 결말에서 과거와 경험을 얘기하던 화자가 제목 그대로 "낙조"를 바라보며 생과 삶 그 자체를 깨닳는 장면에서 구체화되는데, 다시말해 이 초기작은 혼란한 시기를 지나 그 시기를 하나의 발전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자아의 탄생을 천명하는 박태원의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겠음.



하지만 중후기작인 《골목 안》에서 이 선언은 부정, 혹은 좀 가볍게 얘기하자면 재고되는데, 나는 이걸 경험과 의식의 불균형으로 보려고 함.

작품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내용은 자신의 경험과 관계없는 타인의 썰임. 이걸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말하는 거지. 그렇게 주인공은 남의 경험에 기생해서 새로운 경험을 가장하고 주변으로부터 공감과 감탄을 받는 자아로 바뀌게 됨.

결국 《낙조》에서 선언한 "과거의 경험에서 탄생한 자아"는 언제든지 "뱉은 말에 따라 근본이 뒤집히는 불안한 자아"로 변화하게 되고 이는 박태원이 의식 탐구를 포기하고 리얼리즘으로 회귀하는 발판이 됐다고 생각함. 이후 단편들은 이태준과 같은 관찰형 리얼리즘 스타일인데 변동적인 자아에 비하면 현실은 마치 영원한 듯하니까.



지하수기의 지하인간이 스스로의 모순을 깨닳고 경험했음에도 자기자신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건 그 자아가 선천적이기 때문임. 선천적이라면 너무 유전성이 드러나는 표현이니 전통으로 계승되어 온, 토대가 현실과 떨어져 존재하는, 추상성이 담보되는, 이런 말들로 바꿔보자.

지하인간이 그런 식으로 상념을 펼치며 모순을 깨닳고 악랄하게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은 서구의 정신적 유산을 계승했다는게 이유이다.

반대로 박태원은 그런 자아를 인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남겨진 유산과 발판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존재하는 의식이란 뿌리없이 흔들리며 본인의 확신도 갖지 못하고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무정"과 같은 자아인 거임.



박태원이 《골목 안》 이후로 의식의 탐구를 포기하고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심취해 북으로 건너가기 까지는 이런 사고가 바탕으로 있지 않을까? 후에 갑오농민전쟁 같은 역사물을 쓰고 삼국지를 번역하는 것도 가벼운 존재인 자아가 아니라 확고하고 영원한 역사에 기대고자 함이 아닐까? 물론 난 박태원 수필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순전히 뇌피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