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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0. 들어가는 글


이 글이 만갤에 어울릴 법할까? 잘은 모르겠다. 적어도 월간 독갤에 실을 주제 중 하나인 만화를 한 번 기회 삼아 써보고자 했다. 비록 난 만화를 많이 읽은 편은 아닐 뿐더러, 여기 사람들보다 애정하지 않을는지도 그럴 여지가 남는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화로서 매체의 텍스트를 한 번 눈 여겨 볼 필요성을 느꼈다. 만화의 글쓰기란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할까. 그 해답이 이 글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러한 만화의 글쓰기가 나름대로 괜찮은 해석을 도출해낸다는 점은 흥미롭다. 약간의 욕설과 비속어가 섞인 지라 약간 검열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용어를 난립하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기에 양해를 구한다. 되도록이면 가볍게 읽히도록 의도하였으니. 그러니 글의 미숙한 점이 많겠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은 모두 적극적으로 반론이 맞다. 


1. 서론


나는 만화를 유별나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난 보통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를 표현해내는 문자로 쓰인 매체인 소설을 좋아한다.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영화를 그 다음 좋아하고, 그 다음은 아마 애니메이션? 그 다음이 만화다. 최후순위로 선정했다고 싫어하지는 않는다. 잘 안 찾아볼 뿐이지. 만화는 조금 특이한 매체다. 영화와는 다르게 그림으로 그려지고, 애니메이션하고는 다르게 음성이 아닌 문자로 읽힌다. 그렇다고 문자로 읽힌다고 하여 문자밖에 없는 소설하고 구별되는 매체다. 이미지와 텍스트, 만화는 이야기를 그 둘로 표현해내는 매체다. 그래서 소설보다 그래도 쉽게 읽히고,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더 수월하다.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적절히 양립하냐는 점이다.


나는 만화를 읽을 때는 이미지보다는 텍스트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주목하는 부분은 인물의 대사고, 대사 하나 없는 이미지더라도 내 나름의 해석으로 텍스트로 환원해 이해한다. 그러니 솔직히 그림이 좋건 나쁘건 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나, 글과 그림이 따로 놀면 가독성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보통 미국 만화가 좀 그런데, <왓치맨>이 글과 그림이 따로 논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글 자체는 좋은데, 이걸 그림하고 어울리라고 쓴 글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텍스트가 많은 만화를 읽을 바에야 차라리 소설을 읽지 구태여 만화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엘런 무어가 글을 잘 쓰기는 하지만, 그림하고 어울리는 글쓰기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거기다 내가 만화의 텍스트를 이미지보다 비교적 더 중시해도, 내레이션이 나오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비단 미국 만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술자가 개입한 서술이 만화에 나오는 걸 싫어한다. 아니 소설은 문자로 쓰니까 서술자를 도입하는 거지, 만화는 이미지로도 표현되는데 왜 서술자가 나오나. 르포 만화(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이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이쪽에 가깝다)도 아닌 창작된 이야기를 표현하는 만화에 드러나는 서술자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오히려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방해된다. 이야기가 이미지로서 드러냈으면, 독자를 의식하는 인물의 독백 화법이나 서술자가 개입하여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에, 인물의 대화나 상황 전개로 적절히 드러내는 글쓰기가 좀 많이 어려운가. 분업화 잘 된 미국 만화와 달리, 일본 만화가 보통 더 두드러진다.


만화가 무어라 정의되건, 만화는 글과 그림으로 표현된 이야기를 즐기는 매체다.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좋은 만화라 보기는 힘들다. 보통은 일본 만화가 이런 축에 속한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눈깔 크고 기형적인 허리 놀림과 납득하기 힘든 가슴 크기로, 여자와 그리 쉽게 말 터놓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많이 활용한다. 단순 열오리(10+Duck) 새끼들만 위한 만화가 있지는 않듯이, 그말고도 소년만화가 또한 대표적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드래곤볼에서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다, 재미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즐겨하는 재미하고 거리가 멀다. 주로 드래곤볼에서 연원된, 인물들이 나와서 힘의 우열을 측정하고, 서로 싸우다가 강한 상대와 만나 더 싸우는 그런 반복적인 틀을 자주 이용한다. 아니 그래도 성장이라는 주제 하나만큼은 잘 표현하지 않느냐? 내가 싫어하는 이야기가 성장주의다. 


더 나아가서 나는 교훈주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제를 이미 사람은 성장해야 한다, 혹은 발전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미 내놓고서, 그리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거의 답정너 아닌가. 이미 주제와 결론을 이야기 상에서 나왔는데 독자가 일언반구해야겠나. 그러니 이야기의 재미로서 발휘되는 건 인물들의 특징과 외형적인 매력, 그리고 이야기의 세계관뿐이다. 소년만화의 인물들은 성장이 진보적이고 발전적이며 그에 대한 회의를 품지 않고, 세계관은 그게 당연하다는듯이 돌아가게 설정한다. 뭐 소년만화야 애들 보라는 만화니까 그럴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를 보려고 만화를 읽지, 세계관의 참신성이나 인물의 매력을 즐기려고 읽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만화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이미지로서 만화와 텍스트로서 만화, 이 둘을 적절히 양립하는 만화가 있다면 정녕 무엇일까? 내가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어도, 적어도 만화로서 텍스트는 여느 텍스트와 다르다는 건 안다. 문학적인 만화가 될 수 있을지언정 만화는 문학이 될 수 없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텍스트를 완전 현실성 짙게 쓸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음성으로 들리는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문자로 쓰인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이야기의 현실성과 그림의 과장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내는 텍스트가 적합하겠다. 근데 그런 텍스트의 대표적인 예시가 무엇일까? 나는 만화로서 이미지의 구도와 컷 분할, 이런 따위는 잘 모르나, 적어도 만화를 텍스트로서 분석은 가능하겠다. 그래도 글은 좀 읽은 게 있으니까. 


만화의 텍스트라 함은 어떻게 써야 적절할까. 대사가 간명한 것이 좋겠고, 그 대사가 나온 이미지와 잘 맞물리도록 고려해야 한다. 글과 그림 간의 분업화도, 제 나름의 전문성을 발휘하는 체계겠지만, 전자가 글만 잘 쓴다고 하여 능사는 아니다. 그래서 콘티를 그리는 능력을 길러내야 한다지 않나. 그래서 양자 나름대로 균형적이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대중적인 편이고, 어디 만화 커뮤니티에서 칭송 받는 만화의 텍스트를 분석하고 나름의 해석을 내놓고자 한다. 국내서는 <이누야샤>로 유명한 만화가 다카하시 루미코의 <메종일각>, 국내서는 이전에 <도레미 하우스>로도 출판된 만화다. 내게 개인적으로 괜찮은 텍스트로 읽힌 만화다. 잘은 모르지만 만화로서 이미지도 괜찮다고 하고. 


줄거리야, 남편을 일찍이 여읜 과부가 어느 아파트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다, 연하인 젊은 청년과 여리조리 만나고 시간이 쌓이면서 서로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이야기다. 흡사 남성들의 성적인 환상을 구현하는 만화 같기도 하고, 그리 겨냥한 듯싶지만, 나는 이 만화를 계속 읽을 때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는 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그 반대 같은데. 일단 그거는 찬찬히 얘기해두자. 



2. 근대의 과부와 탈근대의 과부


혹여나 독갤러 중에, 우선 위에 언급한 줄거리만 봐도 따로 떠올리는 소설이 있다면 마침 그를 언급할 참이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이것도 똑같이 남편을 여읜 과부 한 명이 사랑방에 찾아온 손님과 어느 정도 연심을 쌓으나 끝내 시대적 한계로 결렬되는 줄거리다. <메종일각>과 차이나는 지점은, 딸이 있다는 점과 시대가 다르다는 점이겠다. 시대 배경이 1920년대 배경으로 한 소설인 만큼, 유교 통념이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수절을 지킬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개인적인 욕망과 사랑을 끝내 단념하는 줄거리다. 사회적 관습에 지배받는 한 과부의 안타까운 상황을 이야기 상에서 제시한다. 


비단 저 옆나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추축국이던 시절만 하더라도, 미망인(未亡人) 단어의 뜻은 본래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한 여인이란다. <물망초>로 유명한 요시야 노부코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인 <미망인>에서 그 실상을 잘 드러내어 묘사한다. 남편과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아 나라와 천황을 위해 전사시키고, 남은 집안 살림을 묵묵히 해내는 과부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내어 선전했다. 재혼은 당연히, 열녀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단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했다.


<메종일각>은 1980년대 주간 만화 잡지로 연재된 만화다. 만화 상에 묘사되는 시대의 분위기를 읽자면, 이전과 다르게 여성상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다. 비단 일본이라서 개인을 존중 받는 사회로 이룩했다기보다 시대적 배경이 가장 주요하다고 본다. 12년 전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어느 나라가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프랑스에 일어난 68운동은, 미국에서는 월남 반전주의와 히피 문화 발산, 일본은 전공투로 전파됐다. 이제는 전체주의가 아닌 개인주의를 존중해주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니 전 남편을 잊고 다른 새로운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사회적 시선이 따가울지언정 존중 받는 시대다. 


하지만 <매종일각>의 과부 오토나시 쿄코는 자신의 전남편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잊지 못한다.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이야기 내내 회상에 빠지면서 그를 내내 드러낸다. 그런 쿄코를 흠모하는 두 남자가 나온다. 한 명은 미타카고, 또 다른 한 명은 주인공이라는 고다이다. 미타카는 부자집 자식에다 테니스 강사로 활동하면서 쿄코를 흠모한다. 이 반면에 고다이는 재수로 겨우 그저그런 대학에 입학하는 데다가 집안도 넉넉하지도 않으며 구직 활동에 애를 먹는다. 우리 모두 다 알다시피, 만화의 주 소비층인 남성들이 이입할 만한, 그만큼 자기 동일시할만한 인물을 넣어야 한다. 결말은 고다이가 쿄코와 이어진다. 


확실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이거는 한쪽이 너무나도 불리하다. 아니 이미 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기라는 말인가. 이미 승부가 확정된 두 인물을 내세우고서, 그것도 납득이 잘 안 가게 해놓았다. 아니 이토록 미타카가 불리하도록 설정해놓은 상태에서. 미타카가 아니라 고다이가 불리한 상황이라고 쓰려던 것이 아니냐고? 제대로 쓴 것이 맞다. 처음부터 이 <메종일각>은 미타카가 불리한 이야기 구조다. 그러면 어째서 미타카가 불리한 이야기 구조일까? 잘생겼고 요리도 잘하고 테니스 강사로 활동하면서 여자들에게 두루 인기 많은 남성인 미타카가 어째서 누가 봐도 아다들 대리만족하라고 만든 인물에게 질 수밖에 없는 걸까? 


솔직히 말해 공감가는 인물은 오히려 미타카고, 고다이는 도리어 공감이 가기가 더 힘든 인물이다. 상술한 바, 고다이는 남성 독자들 대리 만족하라고 만든 인물이라 하지 않았느냐고? 맞다. 초중반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아니다. 작위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 고다이라는 인물의 변화는 너무나 극적이다. 이거는 개연성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고, 다카하시 작자 본인이 고다이의 태도를 크게 간과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왜 이정도로 고다이의 초중반과 후반이 극적인 변화라고 하는지는 다음 단락에서 설명하겠다.


일단 메종일각의 배경은 80년대, 근대를 탈피하려 시도한 탈근대 시대다. 역사를 잘 아는 우리 독갤러들도 알다시피, 두 차례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면서 문화사로서 이성이 각광받던 시대는 점차 시들어져 갔다. 이성을 도구화화여 무언가를 규정 짓거나 단정 짓는 행태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성적이고 규범적인 구조주의에서 그 예외를 포착하는 후기 구조주의로 넘어가는 시대다. 단순 이성적으로 규명하기 힘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그 무언가에 천착한다. 거대 서사로서 을러매던 가치는 사라지고 개인이 스스로 만드는 가치를 중시하기로 이행된다. 이제는 관습적인 규범이나 절도 혹은 예의를 차리기는 이치에 맞는 행동이 아닌 개인에 달린 태도로 변모했다. 


왜 이리 글을 현학적으로 쓰느냐면 지금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주요섭의 소설과는 다르게 이제 과부의 재혼 자체는 자유로워졌다. 쿄코는 여권이 신장한 자유로운 사회에서 재혼에 대한 자유로운 결정권을 지닌다. 이로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다. 저 쿄코를 흠모하는 고다이와 미타카는 이야기 전개 상, 쿄코와 결혼하면 생계를 유지와 관련된 지극힌 사회적인 과제에 몰두한다. 그러나 의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작자는 제일 중요하고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교묘하게 거의 이야기가 다 끝나갈 즈음인 맨 마지막에 배치해둔다. 저 두 인물이 메종일각 내내 직면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러하다. 당신은 전남편을 계속 그리워하는 쿄코를 사랑해줄 수 있는가?



3. <메종일각>으로 읽는 차이 긍정


일단 개연성 문제는 차치해두고, 독자들 몰입하라고 창작됐지만 점점 몰입하기 힘든 고다이가 어떻게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연상인 쿄코를 긍정하고 사랑해줄 수 있었을까? 쿄코가 고다이에게 신경 써주고 잘 해주었기에 그에 대한 보답 차원일까? 그래 보이지 않는다. 작자 본인도 그리 읽히기를 원하지 않는 연출로 그려낸다. 고다이는 진심으로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쿄코를 사랑하고, 말미에 전남편 소이치로를 포용한다. 어떻게 이러한 결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여기서 나는 흥미로운 텍스트를 몇 개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일단 인용하기 앞서 전후 맥락을 설명하겠다. 주인공 고다이는 가까스로 취업한 회사가 부도나버려 지인의 도움으로 보육 교사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어떨결에 쿄코는 고다이가 일하는 유치원에 방문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소이치로가 언급되면서 고다이에게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쿄코의 전남편이던 소이치로는 나름대로 교사로서 유망했지만 그와 달리 고다이는 보육 교사 아르바이트로 체면치레하는 신세다. 


자, 이제 텍스트를 보자.


‘10권 - PART 5 벚꽃의 미로’ 中


#1 고다이: 기일인데도 일부러 내가 어쩌고 있는지 보러 온 건가…?

솔직히… 이런 모습은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2 쿄코: 그렇게 스스로 단정 짓는다면 정말로 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소이치로 씨도 고다이 씨 같은 때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밥도 잘 먹었대요….


고다이: 전… 소이치로씨가 아니에요.


#3 고다이: 어차피 난 소이치로씨랑은 달리, 능력 없는 남자네요.



상당히 별 게 없는 텍스트로 보이지만, 대사가 나오는 순대로 한 배열을 #2 → #3  #1 로 재배열해보고 다시 읽어보시라. 단서를 주자면, 최근에 수능 치른 수험생들은 저 과정에서 무언가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까.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되도 않게 뜸 들이지 말고 설명하다면 저 과정은 정반합적 변증법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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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용한 텍스트를 토대로 게시한 이미지에 맞게 대입하면 이렇다. 정(正)으로서 소이치로는 능력이 있지만, 고다이는 그러지 못하기에 반(反)에 속한다. 이러하여 반에 속하는 고다이는 #1에 보이듯이 반으로서 자신을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나? 자신을 지양함(혹은 ‘거둠’)으로써 정인 소이치로와 합(合)을 맺으려 노력한다.


정(소이치로)의 부정인 자신(고다이)을 또 한 번 부정함으로써(쿄코에게 보이기 싫어함) 합을 맺으려는 과정, 우리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 법칙 과정을 읽을 수 있다. 별 거 아닌 듯한 텍스트가 의외로 흥미로운 해석을 이끌어낸다. 이걸 과대 해석했다고 봐야 할까?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겠다.


‘11권 - PART 11 겁쟁이’ 中


세상에 진짜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지만, 

오토나시 씨(쿄코)는 그게 오직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란다.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를 새로이 좋아하게 되면, 

남편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되는 거지…



저 텍스트는 쿄코가 학생이던 시절 담임을 맡던 선생이 쿄코의 심정을 대신 풀이해준 대사다. 쿄코도 고다이에게 마음이 가 있기는 하지만, 저 텍스트에서 드러나듯이 고다이를 연모하는 자신과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자신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구태여 도식대로 대입한다면, 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정(正)과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반(反)이 서로 대립하며 내적 갈등을 겪는다. 


고다이와 쿄코는 서로 정(正)과 반(反) 간의 대립을 통하여, 합(合)으로 가는 과정을 이뤄내려 분투하는 셈이다. 조금 말을 어렵게 한다면, 정(正)과 반대되는 사고를 전체성으로 환원해 일률적으로 재단해간다. 소이치로처럼 능력 있는 사내로 탈피하려는 고다이와, 전남편을 진정한 사랑이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쿄코, 정과 반 간의 대립을 통하여 반을 부정(지양, 거둠)함으로써, 정과 합을 이뤄내는 종합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둘이 참 짝짝꿍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를 강요하고 환원주의가 팽배한 근대의 망령이 두 인믈을 괴롭힌다. 근대는 심원한 저 감정에서 비롯된 예외를 제거하려 앞다투었다. 도저히 파악하기 힘든 저 감정의 불명확함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의 걸림돌에 불과했다. 실증주의적으로 규명하기도 힘들고 증명하기 힘든 그 감정의 불명확함을 어떻게 파악하겠나. 단정이 그보다 앞서야 했다. 그러나 그게 맞았을까? 이성적인 사고와 그로인한 결과가 우리를 발전하도록 이룩시켰을까. 그런 건 없었다. 섣부른 단정이 많은 것을 간과했다. 


근대철학이 낳은 현대 철학은 아비의 과오에 반성하고 이제 달리 본다. 우선 변증법 지랄 말라는 한 명이 나타났다. 그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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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ㄴㄴ



영원한 포스트모던 철학의 영웅이자, 그 말도 안 되는 ㅎㄴ유충 논문에도 인용되는 들뢰즈는, 정(正)과 반(反)의 사이는 대립이 아닌 차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부정의 부정’ 법칙은 저리 치우고, 자신이 개발한 ‘긍정의 긍정’을 제창한다. 이 ‘긍정의 긍정’ 개념은 무엇일까? 우선 상술한 저 #2를 참고하자. 쿄코는 정말로 소이치로와 비교하려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소이치로를 괜히 들먹여서 분위기 싸하게 할까. 왜냐면 쿄코는 고다이게서 소이치로 간의 유사성을 확인해서다. 


쿄코는 ‘4권 - PART 3 돌아보는 소이치로’에서 고다이와 소이치로 간의 유사성을 확인했다. 자신이 전남편의 이름을 물려준 애견을 잃어버리다, 고다이가 찾아내어 개와 같이 거닐던 모습에서 소이치로를 연상한다. 단순 이만으로 고다이와 소이치로를 같게 본다는 뜻은 아니다. 쿄코는 소이치로와 고다이는 서로 다르다고 명확히 인식한다.


‘10권 - PART 5 벚꽃의 미로’ 中


#4 쿄코: 두 사람은 달라, 고다이 씨랑 소이치로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인걸.


그렇다면 유사성을 주목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유사성은 차이의 결과라는 들뢰즈의 말을 떠올려보기로 하자. 쿄코는 고다이와 소이치로가 다르기에 유사성을 확인하다. 쿄코는 고다이에게서 소이치로와 유사한 모습과 유사하지 않은 모습을 인식한다. 그러니 고다이에게서 소이치로와 닮은 면과 닮지 않은 면이 서로 공존함을 안다. 그러면 쿄코는 소이치로처럼 행동하기를 바랄까? 저 둘을 대립시켜 정반합적 변증법을 거쳐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아니다. 쿄코는 소이치로 닮지 않은 고다이의 모습도 긍정한다.


들뢰즈의 ‘긍정의 긍정’ 법칙은 여기서 드러난다. 정(正)으로서 소이치로와 닳은 면이 있는 고다이와 반(反)으로서 소이치로와 닮지 않은 면이 있는 고다이, 쿄코는 이 둘을 대립하지 않는다. 둘 사이는 차이가 날 뿐이다. 오히려 정의 부정인 반을 긍정한다. 달리 말해, 쿄코는 소이치로와 닮지 않는 면이 있는 고다이를 긍정한다. 정과 그의 부정인 반 또한 긍정하며, 이 둘이 합친 합도 긍정하는 ‘긍정의 긍정’을 내보인다.


‘10권 - PART 5 벚꽃의 미로’ 中


#5 쿄코: 고다이 씨는 고다이 씨니까……, 고다이 씨 나름대로… 열심히 하시면 돼요.


고다이는 자신을 소이치로서 아닌 모습도 긍정한다는 저 간접적인 고백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에 갑작스럽게 고다이는 저 쿄코의 태도와 유사해진다. 비록 내가 잘못 읽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읽히었다. 아무튼 그를 드러내는 대사가, 자신을 흠모하던 코즈에와 관계를 정리한 뒤 돌아가는 전철을 타고 쿄코를 반추하며 독백한다. 


‘15권 - PART 1 진실’ 中


#1 고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이야, 코즈에…. 


#2 고다이: 걸핏하면 질투하고 지레집작하고 울고 화를 내지만, 

그 사람이 웃어주면 …난 최고로 행복해….



고다이는 쿄코를 여러 사건 겪으면서 알아갔다. 쿄코는 질투하고 지레짐작도 하고 울고 화를 내나, 자신은 그 사람이 웃어주면 최고로 행복하단다. 한 번 이 텍스트를 분석해보자, 단순 고다이가 자신에게 웃는 모습만을 좋아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앞의 문장들은 저리 쓸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에게 웃어주면 행복하다는 대사 하나면 족하다. 


그러나,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웃음 말고도 쿄코의 여러 모습을 열거한다. 고다이는 그런 모습들에 부정적일까? 그에 대한 판단은 저 텍스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적어도 자신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쿄코의 웃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다른 모습들도 수반하는 점만큼은 인지한다. 자신에게 행복을 전달하는 쿄코의 웃음과 그 외 나머지 모습은, 그저 차이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둘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니 한 모습만 긍정하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 웃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이러하여 고다이는 나중에 쿄코와 마음이 이어진다. 그러나 전남편을 잊기 힘들다는 쿄코의 고백을 듣는다. 쿄코는 분명히 고다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못내 전남편을 잊지 못한다. 반면 고다이는 전부터 전남편을 잊어주기를 바라왔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쿄코와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쿄코 사이는 대립이 아닌 차이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해주는 쿄코가 있었기에,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쿄코가 있고, 그 역도 성립한다. 쿄코의 두 모습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둘이 있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쿄코가 성립한다. 그래서 고다이는 전남편의 묘비 앞에서 이리 고백한다.



‘15권 - PART 9 벚나무 아래서’ 中


#1 고다이: 솔직히 말하자면, 소이치로씨가 부럽습니다…. 

유품을 시댁에 돌려드린다고 해도…. 

쿄코씨는 당신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2 고다이: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처음부터 만난 그날부터 쿄코 씨 마음속엔, 당신이 있었고…, 

저는 그런 쿄코씨를 좋아하게 된 거니까요. 

소이치로씨까지 함께, 제가 쿄코 씨를 품겠습니다.



저게 정녕 아다들 자위하라고 창작된 인물인가 싶다. 갑자기 저러한 태도로 돌변하는 개연적인 이유가 내가 읽어 봤을 때는 좀 부족했다. 그 과정이 내가 모르는 장면에서 드러났을지도 모를 일이나, 그나마 나름의 결과가 저리 나온 개연적인 인과라면 고다이의 우유부단함이 아닐까 추측한다. 고다이는 일단 독자들 대리만족하라고 만든 인물인 만큼, 어느 특정 인물과 사귀기로 결정하여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질질 끈다. 시쳇말로 고구마라 하는데, 나는 좀 다르게 본다.


오히려 그러한 우유부단함이 쿄코의 모습들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면 마음을 확실히 드러내어 단정짓지 않고 계속 옆에서 지켜보고 봐주었으니까. 쿄코와 갈등도 경험하고 여러 모습들을 목격하였기에, 단순 쿄코에게 무작정 고백하여 결혼하자는 말 대신에, 서서히 알아간다. 그로써 고다이는, 소이치로를 그리워하는 쿄코와 자신을 좋아하는 쿄코, 질투하거나 지제짐작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곤혹스럽고도 민망한 처사를 주는 쿄코기도 하나, 자신에게 웃음을 내보임으로써 행복도 내주는 쿄코, 이 모든 쿄코들을 인식하여 종합한 하나인 쿄코로 이루는, 정반합(正反合)적 종합이 아니라 이접(異接)적 종합으로서 쿄코를 받아들인다. 


이 정도면 거의 백마 탄 왕자님급 아닌가. 겁나 낭만적이다. 이 정도면 솔직히 쿄코보다 고다이가 아깝다.



4. 나가는 글


물론 내 해석이 정론이라 생각도 안 하고, 한 번쯤 이러한 해석도 내놓을 수 있지 않나 해서 글을 썼다. 여러 만화 커뮤니티에서 왜 미타가 대신에 고다이를 골랐냐는 의문이 많은데, 고다이가 전남편을 그리워하는 쿄코를 포용하는 전개가 이미 예정됐다면 다 끝난 거다. 그게 작중에서 가장 중요하니까. 저걸 마지막에 배치해둬서 그렇지, 작중 내내 저게 가장 중요하다고 시사한다. 그러니 고다이는 쿄코를 위한 수입과 생계 문제만 해결하면 끝이다. 


나는 그보다도 갑작스러운 고다이의 태도 변화가 더 이해가 안 갔다. 작자의 역량 한계인지, 아니면 남성들 이입하기 힘들어하여 잘 안 하였는지는 몰라도, 고다이의 개연적인 변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거는 어떻게 보면 만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겠는데, 만화 상에서 성적인 욕망을 표출하는 연출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고다이는 쿄코의 몸매에 욕망을 품는 데 반해, 쿄코는 그렇지 않는다. 그게 인물의 성격이라고도 한다면 할 말 없으나, 생각해보라. 저 고다이라는 인물을 흠모하는 여성만 해도 두 명이다. 그리고 만화 상에서 잘 부각되지 않는데, 가슴과 어깨가 넓은 데다가, 비율도 좋다. 저런데 성적인 욕망이 없었을까. 처사의 균형도 맞지 않았는데, 쿄코도 고다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사라는 점을 거의 끝나갈 즈음에 드러낸다. 


물론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과부의 여성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 어쩔 도리야 없겠지만, 나는 마냥 이게 괜찮은 만화로 남을지언정 좋은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물의 자연스러운 개인적인 욕구를 개방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까지 바라기도 주제 넘는다. 주간 만화 잡지에 단 한번도 휴재 없이 연재된 만화치고는 괜찮다고 봐야겠다. 그점에서 비추어본다면 작자의 다른 만화보다 이게 제일 좋다. 확실히 80년대스러운 이야기였다. 탈근대적인 사랑, 포스트모던스러운 사랑을 잘 표현했다. 기회되면 네이버 시리즈로 한 번 읽어보라. 괜찮다. 


덧붙이는 글로, 저 변증법의 해석은 주로 들뢰즈에 기운 쪽으로 인용하였을 따름이지, 정론적인 해석이라고는 못한다. 헤겔의 변증법에도 워낙 해석이 많은지라, 단순 단언하기는 어폐가 있다. 


이것으로 글을 끝내면서, 나중에 기회되면 만화 번역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만화의 텍스트를 문학 텍스트처럼 번역하여도 될까? 나는 아니라 보는데, 나중에 기회되면 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