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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임.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이 일이 공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에서 상은 좋고 기쁩니다.” 이청준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사실 공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선 한국일보 창작 문학상이나 독갤배 감상문 상이나 크게 다를 건 없지 않을까. 앞으로 날 독갤의 이청준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이청준이 죽은 건 2008731일의 일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한 주 앞두고서였다. 난 때때로 이청준이 죽은 날을 상상해보곤 한다. 병실에서 죽었겠지. 옆엔 가족들이 주욱 앉았을 거고, 심박 측정기가 주기적으로 삑 삑 소릴 흘렸겠지. 링거 속으로 수액이 똑 똑 떨어지고, 박자에 맞춰 간호사와 의사가 춤을 추려나, 침상 밖으론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먼지 한 올 움직이지 못했겠지, 그 사이로 간간이 터져나오는 울음소리, 그런데 간호사는 환자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을까, 당신들의 천국이나 이어도를, 매잡이나 병신과 머저리를 읽어봤을까, 그 소설을 읽어보고서도 그렇게 경박한 몸놀림으로 부단히 승압제를 투약하고, 심장제세동기를 갖다 댈 수 있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실제로 어땠는진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니 하나, 죽는 그 날 이청준이 괴로워했는지, 그것만큼은 알고 싶다. 이청준에게 삶이 더 아팠는지 죽음이 더 아팠는지, 딱 그거 하나만.


난 한강을 싫어한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늘 뒷맛이 씁쓸했다. 주위에선 하나같이 좋은 작가다, 그러니까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내면에 진정한 선함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 반응을 내놓았다. 한강은 오래도록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왔으니까. 난 그런 한강이 좀 독선적이라 생각했다.


오한기를 읽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본 건 아시아 출판사에서 매 반기마다 내놓는 한국 현대 문학 시리즈에서였다. 박형서의 아르판’, 박민규의 버핏과의 저녁식사와 나란히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 마침 한강의 작별을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니만큼 죽음과 폭력을 그만큼 가볍게 다루는 오한기란 작가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둘의 차이를 써보고 싶었다. 문학과 폭력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고 싶었다. 여름에 둘을 비교하는 글을 써서 올렸다. 완성하진 못했다. 사실 그대로 고이 접으려 했다. 그 때 한 분의 댓글이 가슴에 꽂혔다. “한강 단편 중에서 훈자가 제일 이해 안 갔는데 이런 의미였구나.한강과 오한기의 소설은 해설 없이 읽을 만큼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괜찮은 해설이 딸린 것도 아니다. 그래서 꾸역꾸역 다시 펜을 잡았다. 그러니만큼 내 글보단 책을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책을 읽고도 이해가 안 되면 그 때 내 글로 다시 돌아와줬으면 한다.


덕분에 여름에 썼던 글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나란 인간을 진지하게 들여다봐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말마따나 글을 쓴 다는 것은 개인적인 일일 테니까.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