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영. 정조 대는 일반적으로 탕평정치 시기로 인식된다. 이 시기의 정치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의리라는 것이다. 의리는 숩게 말해 명분이다. 이미 숙종에서 경종-영조로 이어지는 시기에 수많은 정쟁과 연잉군(영조)에 의한 경종 독살설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영조는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자신의 즉위 명분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무신란 직후 영조는 자신의 즉위 의리를 확립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는 경종 대 신임옥사로 희생된 노론 4대신9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와도 연관된 문제였다. 영조 즉위 이후 김일경 등을 처단했으나, 신임옥사에 대한 처분을 바르게 하고,, 영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이 영조 초반기 최대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영조는 기존의 환국정치 대신 탕평파를 등용하여 조금씩 신임의리에 대한 공인 작업을 진행해나갔고, 신유대훈의 완성으로 이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나 을해옥사로 영조의 신임의리에 대한 문제가 드러났고, 세자와의 갈등은 정국을 다시 요동치게 만들었다.
세자와 영조 사이가 점점 나빠지면서, 세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세력과 세자를 흔드는 세력으로 신료들은 분화했으며, 결국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이후에 세손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정후겸, 홍인한 등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는 등 득세했으나, 홍국영, 서명선 등의 활약으로 세손이 즉위한 이후 이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세손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홍국영이 외척 행세를 하며, 멋대로 행ㅇ동하자, 정조는 홍국영을 제거한 후 임오의리에 대한 점차적인 재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도식적으로는 시파는 정조의 정책에 찬성했고, 벽파는 반대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사안마다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정조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파들을 통제했다.
정조의 의리사업은 매우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각 당파의 임오화변 역적 토역 요구 및 사도세자 추숭 요구를 때에 따라 부분 수용이나 부분 거절하기도 하고, 토역 요구에 있어서는 죄가 확실한 부류에 대해서만 처벌하는 등, 즉위 전반에 걸쳐 사도세자 추왕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과정은 탕평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수많은 당파로 분열된 당시 정국에서 의리 해석의 주인을 완전히 군주로 옮겨버리며, 정조 후반부에는 체재공이나 서명선 계열, 김조순, 심환지 등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정파가 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정조는 오회연교를 통해 자신의 임오의리가 공공의리이며 대의리임을 천명했고, 대다수의 신료들은 이에 동의했으며, 정조의 양위 계획인갑자년 구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 이후 정조 의리는 파탄을 맞았다. 결국 정조의 의리는 서로 다른 당파들이 서로를 축출하는 데에만 이용됐으며, 이는 결국 탕평의 파탄을 의미했다.
애초의 영조와 정조의 의리 공인 작업은 10년 이상의 긴 기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국왕의 실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 있던 순조 초기에는 이러한 영. 정조의 의리를 이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 번 손상된 의리는 순조의 친정 이후에도 복구되지 못했으며, 이러한 의리의 손상은 순조에게 국정 운영의 동력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 정조 대 정치사와 의리 문제는 매우 어렵고 힘든 주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정파들의 이합집산이 너무 심했기에 단순히 노.소로 시. 벽파 수준이 아니라 노론 남당, 북당 등 새로운 정파들이 많이 나왔고, 이러한 정파들의 역학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