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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플로베르가 될 수 있었을까?

마담 보바리를 띵작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장편이라는 것이다. 마담 보바리에서 장면장면은 이어지는 서사보단 하나의 스냅 사진처럼 멈춰있다는 느낌을 준다.

인과관계란 언제나 후대의 시각에서 관찰하였을 때 발생한다. 현재 사건이 일어나는 지금이라는 시점에선, 무엇이 원인이 되고 무엇이 결과가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플로베르는 한 시점을 물고 늘어지며 파고든다. 그 묘사가 이후 복선으로 작용할지, 서사의 단초가 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장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면모를 담는 것이 그의 목표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이기에, 서사란 피할 수 없는 족쇄로 다가온다. 이 둘 사이의 균형-서사와 묘사라는-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비록 이효석이 단편 위주로 썼고(나 또한 단편만 읽었지만) 그의 단편은 짧은 글 안에서도 서사가 완성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정성 짙은 묘사 끝에 이도저도 아닌 문장으로 끝맺는 애매모호한 작품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이러한 문제점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묘사의 기술을 장편소설로까지 확장시킨다. 각 장은 뚝뚝 끊긴 서사처럼 진행한다.

하지만 소설의 전체에서 우리는 무언가 앞으로 나아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묘사를 위한 어휘 기술의 차력쇼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된 서사인 것이다.


그렇게 묘사와 서사는 서로 균형있게 나아가며 소설의 내용물을 채워나간다. 묘사는 멈춰진 순간의 미학적 요소들을 포착해 인간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서사는 그 묘사들이 포착해낸 요소들을 은연 중에 계속 연결해가며 소설 전체의 통일성을 구성한다.

이효석에게서 부족했던 것은 서사를 끌고 나가는 실력이다. 아무리 문장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새로운 형식을 선보인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실패한 소설이다.

소설의 내부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무언가는 서사이다. 그것이 설령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소설이란 서사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