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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명작 돈키호테를 전부 읽었다. 이렇게 두꺼운 벽돌같은 하드커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건 처음이다. 총 2권으로 된 책을 한권 읽는데 일주일씩 시간을 썻다. 나는 하루에 100페이지정도만 읽어도 집중력을 모두 써버린다. 읽는 것도 적은데 저주받은 독서력을 가져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지 못하다.
돈키호테는 굉장히 재밌는 소설이다. 요약하자면 기사 소설을 읽다가 정신이 나가버린 노인이 자신의 진짜 기사라고 믿고 광기에 취해 자신의 종자 산초 판사와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주제를 빼고 보더라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전개 방식을 웃기게 써놨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해 전력 돌진을 해서 나가떨어지고, 자신의 광기로 만들어낸 오해로 다른 사람들에게 덤볐다가 맷돌에 갈린 밀처럼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재미로 자신을 속이는 이들에게 놀아나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책의 전반에 걸쳐 돈키호테와 산초가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한 기행들과 그들이 펼치는 모험과 사건들은, 독자로 하여금 유머적인 내용만 집어 넣어만든 익살집. 개그소설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몇장만 읽어서는 마치 이거 야설 아니야? 라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하루키의 소설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돈키호테는 그저 미친 짓만을 하는 광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등장인물 속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분명한 분별력을 가지고 언제나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논리로서 말한다. 그가 평범하게 말을 할때면 그의 전개하는 수사법을 듣고 있으면 설득되고,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울 정도다.
이러한 태도에 책속의 등장인물은 물론 책을 읽고 있는 독자까지 돈키호테가 미쳐있는지, 아니면 제정신인지 그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적어도 내가 볼때는 돈키호테는 자연에 의해 정신을 잃어버린, 그로 인해 정신병동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불쌍한 광인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돈키호테는 자기 스스로 미치기를 희망한 광인으로 보이고싶었고, 스스로도 광인이고 싶었던 자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돈키호테가 처음부터 전혀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보다 분별력 있는 모습을 보이고 기사소설과 관련이 없는 경우에서는 이성과 논리를 통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낼만한 연설과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러니 그의 광기는 단순히 연기였을 수도 있고, 돈키호테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그 광기를 스스로 거두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 본다. 그가 붙잡고 광기를 놓은 건 자신의 삶이 다하기 직전, 결국 위대한 기사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채 몇 장 남지 않았을 때였지만 말이다.
돈키호테의 해석과 비평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뛰어난 문체로 다양한 관점으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해석한 글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내가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국어 시험에서 답이 정해진 지문을 적어내는 일 또한 아니니, 정해진 답이 없으니 말이다.
돈키호테는 이 책을 읽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이상" 을 끝없이 쫓으라는 것 같다.
여기서 "이상"은 꿈일 수도 있고, 사상일수도 있으며,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편력 기사, 책속의 영웅이나 위인들의 모습처럼 놀랄 만한 업적을 세운 자신일 수도 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모습은 제각각이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 이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상은 쉽게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이룰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내가 재벌 2세로 다시 태어나는건 불가능하며, 이세계로 떨어지거나, 갑자기 초능력이 생겨서 어벤저스에서 스카웃 제의가 온다는 것처럼 말 그대로 허무맹랑한 소리며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들이니 말이다.
누구는 현실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꿈을 이룰 수 없기에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이상은 닿을 수 없기에 동경하게 되는 것이라고. 누군들 그런말 못하냐.
이룰 수 없는 이상이란, 여기에 더해 남들의 이해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누구나 어릴때 티라노사우르스가 되는 장래희망을 가지지만 실제로 티라노사우르가 된 어른은 없지 않은가. 하다못해 스테고돈이 된 어른이 없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자신의 이상을 끝없이 쫓았던 캐릭터다. 기사 소설을 읽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편력 기사가 동경했고, 결국에는 스스로 편력 기사가 되겠다며 자기 자신에게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울림 좋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조상인 이달고의 낡은 갑옷과 방패, 창으로 무장하고 평안하고 축복받은 일상을 뒤로 한채 로시난데의 박차를 가해, 그의 충직한 종자. 산초와 함께 역경과 고난이 기다리는 모험에 나섰다. 오직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말이다.
그 이상이란, 자신의 따르는 편력 기사도에 따라 모욕을 쳐부수고, 고아들과 후원인 없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고, 미망인들의 명예를 지키며, 오직 자신의 귀부인. 둘리네아 톨 소보소을 위해 고난과 역경을 마지않는 것이다.
기사 소설 속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따르며 살아가는 돈키호테는 오직 자신의 귀부인 돌리네아를 위해 산초와 함께 많은 모험들을 겪고 해결해 나간다.
2권에 이르러서는 "자칭" 편력기사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자신 뿐만 아니라 남들이 먼저 인정해 마지않은, -비록 그것은 그의 광기에 어울려 주는 놀이에 불과하다더라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편력 기사로서의 명망을 얻고,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거짓으로라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돈키호테도 결국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 마지막에는 현실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로시난테에서 낙마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이상만을 쫓았던 돈키호테가 광기에서 그만두고,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라만차의 이야기는 끝나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 시점에 이르러 작가는 우리에게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그의 입을 통해 죽기 전의 유언으로서 자신의 모험을 평가하게 한다. 돈키호테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광기를 인정하고, 이제까지 해왔던 자신의 모험이 부질없고, 의미없었음을 고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독자로서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치 마법사나 현자처럼 돈키호테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많은 말에 그의 말을 긍정했지만 그의 마지막 유언은 그의 모험과 시작과 끝을 모두 지켜본 자로서 확실히 부정할 수 있었다. 나도 마지막까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돈키호테의 최후를 같이 지켰으니, 이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돈키호테의 마지막 말에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비평에 뛰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만드는 지금의 내 행위가 진정으로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키호테의 삶은 그의 유언처럼 의미없지 않았다. 광기로 편력기사라는 이름을 달고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광인의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돈키호테의 자신의 이상을 쫓는 모습은, 돈키호테의 주변 인물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의 광기가 그의 종자 산초 판사에게도 전염되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고, 산초 또한 그의 주인 못지 않은 광인이라고 말하지만 이상에 대해 생각해 본적도 없고, 몽상보다는 현실주의자에 아는것또한 농사일 이외에는 없으며, 글조차 읽지 못하는 일자무식, 돈과 먹을 것을 밝히고, 멀리 내다보는 법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던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의 광기, 혹은 다른 말로 그의 이상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산초는 돈키호테와 같이 편력기사의 모험을 같이 하는 동안 그의 주인인 돈키호테와 비교해봐도 부족하지 않은 훌륭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때에 맞지 않던 속담으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고작이었던 익살꾼은 이야기의 끝에 다다라서는 자신의 말로 철학자처럼 남을 설득하고, 분별력 있는 말로 돈키호테는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판관으로 변화한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2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돈키호테와 만났던 착하기만 하고, 그저 바보인 산초 판사가 아닌, 정말로 섬을 통치할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서 성장을 한다. 그가 정말로 섬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곳의 사람들이 마지막의 순간에 산초처럼 훌륭한 통치자를 떠나보내는 것을 진심으로 아쉅게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산초의 변화야말로 우리가 이상을 쫓아야 하는 이유이고, 이상을 쫓는 것의 강력한 영향력이고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산초와 돈키호테는 편력 기사라는 이상을 쫓는 일을 함께 해나가면서 자신이 원했던, 돈키호테의 존재로 만들어진 이상. 마을에서 그의 당나귀를 키우며 살았다면 닿지 않았을 섬의 통치자라는 자신의 이상에 누구보다 가까이 가게 된 것이다.
소설. 돈키호테에서는 정말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다. 자기개발서에서 자주 말하는 풍차에 돌진할 정도의 과감한 그의 행동력, 분별력있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그의 수사법, 기독교가 지배한 세세계에서의 가치관, 기사의 명예. 마음에 드는게 정 없다면, 일이 없을 때 재미를 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얻을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작가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돈키호테의 영향을 받는 변화한 산초 판사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불가능하더라도 이상을 꿈꾸며 그리고 이상을 쫓으라고 말하는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원해 마지않는 것이 있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광인으로 보이고, 광인이고 싶었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돈키호테를 성경에 비교하곤 하는 평가가 있다. 나는 다른 의미로 그것이 이해가 된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말을 전부 따르며 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성경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보다는 남에게 헌신하며, 가진걸 나누라는 그 책의 말대로 산다면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때, 독실한 사람. 예수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험을 떠나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불가능한 이상에 도전하고, 이상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몇몇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들먹이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에 돌진하는 걸 한심하다고 조소하고, 비웃는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 자리에 앉아 불평 불만을 말하고 있을 때 몇몇은 말에 올라 자신의 이상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박차를 가해 돌격한다.
그 바보같아 보이는 돌격에서 엎어지고 매맞고, 쓰러지고,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실패해 버린다고 해도, 그 실패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게 아니다. 자신의 이상에 있는 힘껏 돌진한 이는, 갑옷과 창을 들고 돌진하지 않은 이보다는 자신의 이상에 분명히 더 가까이 다가갔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다시 도전할 생각을 갖지 못하고 이상을 쫓다 엎어져버린 이들이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고, 스스로는 비참하게 자신이 쫓던 별에 닿지 못했다며 자신의 실패를 절망적으로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을 쫓던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곁에서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 라만차가 기발한 편력기사가 아니며,
산초 판사가 현명한 통치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있는 자가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도 가능하다면 이상을 쫓아야 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라고 욕먹고, 그것이 정말 지상 위를 달려서 저 하늘의 별에 닿는 것처럼 이룰 수 없는 일이라도 할지라도, 이상을 쫓을때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을 믿으며 말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쫓자.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별에 닿지 못하더라도 처음보다는 이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젠가 하늘의 저 별에 손에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봤자 티라노사우스는 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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