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체유부와 나가르주나의 답변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요? 제 생각엔 님이라면 설일체유부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중론의 방식으로 진행하면 안된다고 할 거 같아요.
말테의수기(artistrainer)2021-12-10 02:00
답글
아! 니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거 번역좀여! 그대로가 낫나요?
말테의수기(artistrainer)2021-12-10 02:08
답글
저에게 설일체유부나 나가르주나의 견해는 둘다 단지 '철학적 접근'일 뿐인 것으로 보여요.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중생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의 규명이 아니라, 오직 닙바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접근이 닙바나를 향해 가는 데에 실효성 있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부를 수 없어요. 저는 대승은 불교가 아니라 단지 불교적 어휘를 사용한 철학, 예술적 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봐요, 마치 헤세의 싯다르타처럼요. 대승이 가장 간과하는 점은, 부처님께서 천명하신 것이 실제적인 세상의 구조와 자연법칙이라는 것이에요. https://puredhamma.kr/introduction-a-scientific-appr
익명(125.183)2021-12-10 03:09
답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문장의 원문이 궁금하신 건가요?
익명(125.183)2021-12-10 03:10
답글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이거긴 한데 뭔가 제가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정확히 무엇을 물어보시는 건지 다시 말씀해주실래요?
익명(125.183)2021-12-10 03:16
답글
참 여러모로, 좋은 뜻으로 멀리 있다는 느낌을 받네요. 하지만 생각하기에, 그런 쓸모없어보이는 사소한 문제가 그런 열반에 대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요? 비트겐슈타인도 램지의 색깔 배제 문제라는 사소한 것으로 그의 토대를 부숴냈거든요.
말테의수기(artistrainer)2021-12-10 04:01
답글
예를 들어 자성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봐라봐야 할지라는 문제는 좀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 그런 큰 목표에 대해서요...
말테의수기(artistrainer)2021-12-10 04:02
답글
무쇠 그거도 번역이 이상한 거 아닐까 하는 불순한 마음에서 그랬습니더...
말테의수기(artistrainer)2021-12-10 04:03
답글
그것을 완전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을 배워야 해요. 하지만, 대승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저히 띠삐따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루빡칸다는 흔히 통용되는 색온, 물질 무더기로 번역되어서는 안 돼요. 루빠와 루빡칸다는 달라요. 전자는 물질이지만, 후자는 물질에 대한 자신의 인상으로, 완전히 정신적인
익명(125.183)2021-12-10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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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에요. 후기 주석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테라와다의 견해와 대승경전을 기반으로 한 마하야나의 견해 모두, 이러한 차이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변방적이고 부수적인 개념만 천착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띠삐따까에서는 닙바나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혀 여겨지지 않는 보디삿따 개념은 대승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져요. 즉,
익명(125.183)2021-12-10 04:27
답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이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변방적 개념인지를 구분하려면, 그 과정은 절대적으로 띠삐따까라는 1차 텍스트 내에서 이루어져야 해요. 2차 텍스트들, 특히 대승 경전들과 청정도론을 포함한 후기 주석서들은 신뢰할 수 없어요. 주석서나 이후에 산스크리트어로 인 경전들은 본래의 체계를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까야 아함경은 부분과 전체가 아니라 번역된 언어 차이임. 동남아로 전파된 게 니까야, 중국으로 가서 번역된 게 아함경. 당연히 거의 비슷하고 약간 차이가 있으.
익명(14.39)2021-12-10 03:04
일단 <불교 - 과학시대의 종교>, 마성스님의 <사캬무니 붓다>, 일묵스님의 <사성제>,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이해> 순으로 한 번 읽어보자. 아님 바로 경전부터 보고 싶으면 전재성 역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빠다)>이 그나마 쉽고 명료하면서 좋은 말들이 많아 괜찮지 않을까 싶음. 갠적으론 <법구경>을 가장 좋아하구.
익명(223.39)2021-12-10 08:47
답글
윗 갤러 주장이 틀렸다는게 아니고, 비법과 정법을 가려주실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후대 주석서들과 대승경전을 신뢰하고 말고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공부해보고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함. 윗 갤러의 주장도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 내린 결론일 거고.
익명(223.39)2021-12-1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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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혹시 그 불교 플로차트 이야기 하는 거면 그거 만든 사람임이 본인임. 당신 말이 맞음. 결국 스스로가 결정내려야 할 일이고, 결코 남이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함. 내가 요즘 고민하는 게 이 지점임. 내가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은 옳지 않음. 진리는 설득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임.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된 담마를 접할 기회는 정말 드물고
이 링크에서 8번부터 보면 청정한 설법에 대한 기준이 나오는데, 타인이 나로 인해 믿음을 갖기를 하는 마음으로 설하면, 그것은 청정하지 못한 설법이라고 되어 있음. 나는 이것에 정말로 깊이 동의함. 그렇다면 청정한 설법은 무엇이냐 하면, 담마의 여섯가지 덕성을 숙고하여 담마는 본래부터 수승하고 진리임을 보고, 판단은 듣는 자에게 맡기되 그들에게 자애와 연민
익명(125.183)2021-12-1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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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지는 것임. 그래서 나는 담마 자체를 간소화하여 쉽게 전달하는 방식은 애초부터 그릇된 접근이라는 결론을 내렸음. 그것은 단지 제2, 3의 대승을 만들어낼 뿐임. 결국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 스스로가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장려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졌네.
익명(125.183)2021-12-10 09:44
답글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음. 자애명상을 되새기게 되네.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하기를. 다치지 않기를. 아프지 않기를. 퇴락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번뇌가 없기를. 그리고 스스로 닙바나를 향해 나아갈 기회를 얻기를.
익명(125.183)2021-12-10 09:47
답글
그 플로우차트를 님이 만들었고, 또 '퓨어담마'를 접하게 됨으로써 플로우차트를 수정한 것도 알고 있음. 그러나 님이 불교를 '퓨어담마'로 처음 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초심자들이 개론서부터 읽으면서 불교를 차츰차츰 배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그러는게 맞다고 봄.
익명(223.39)2021-12-1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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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스스로 공부해서, 뭐가 맞고 틀린지 스스로 분별해서 '퓨어담마'를 정법으로 판단했듯이 말임.
익명(223.39)2021-12-10 10:12
답글
어떤 입장인지 알 것 같네요.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일반인이 퓨어담마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부분을 최근 들어서 느끼고 있어요. 차츰차츰이라는 방식의 무게를 알아가고 있어요. 그렇기에 선생님의 말씀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어요. 깊게 생각해볼만한 거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니까야 읽으세요
그거 500쪽짜리 5권이던데요ㅋㅋ 저는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418011
이게 제 경험입니다...
초기불교는 아함경이나 법구경이나 수타니파타 같은 거 읽는 게 좋을 듯?
아함경은 5개 니까야 중 하나를 뺀 거고 법구경은 담마빠다라 해서 시편 비슷한거래. 이 구조를 아직 다 모름
이것 참조하면 좋을듯
https://puredhamma.kr/essence-of-buddhism-in-the-fir
이것도 보셈
https://puredhamma.kr/anatta-and-sakkaya-ditthi-two
설일체유부와 나가르주나의 답변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요? 제 생각엔 님이라면 설일체유부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이 중론의 방식으로 진행하면 안된다고 할 거 같아요.
아! 니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거 번역좀여! 그대로가 낫나요?
저에게 설일체유부나 나가르주나의 견해는 둘다 단지 '철학적 접근'일 뿐인 것으로 보여요.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중생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의 규명이 아니라, 오직 닙바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접근이 닙바나를 향해 가는 데에 실효성 있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부를 수 없어요. 저는 대승은 불교가 아니라 단지 불교적 어휘를 사용한 철학, 예술적 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봐요, 마치 헤세의 싯다르타처럼요. 대승이 가장 간과하는 점은, 부처님께서 천명하신 것이 실제적인 세상의 구조와 자연법칙이라는 것이에요.
https://puredhamma.kr/introduction-a-scientific-appr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문장의 원문이 궁금하신 건가요?
Eko care khaggavisāṇakappo 이거긴 한데 뭔가 제가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정확히 무엇을 물어보시는 건지 다시 말씀해주실래요?
참 여러모로, 좋은 뜻으로 멀리 있다는 느낌을 받네요. 하지만 생각하기에, 그런 쓸모없어보이는 사소한 문제가 그런 열반에 대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요? 비트겐슈타인도 램지의 색깔 배제 문제라는 사소한 것으로 그의 토대를 부숴냈거든요.
예를 들어 자성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봐라봐야 할지라는 문제는 좀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 그런 큰 목표에 대해서요...
무쇠 그거도 번역이 이상한 거 아닐까 하는 불순한 마음에서 그랬습니더...
그것을 완전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을 배워야 해요. 하지만, 대승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저히 띠삐따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루빡칸다는 흔히 통용되는 색온, 물질 무더기로 번역되어서는 안 돼요. 루빠와 루빡칸다는 달라요. 전자는 물질이지만, 후자는 물질에 대한 자신의 인상으로,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에요. 후기 주석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테라와다의 견해와 대승경전을 기반으로 한 마하야나의 견해 모두, 이러한 차이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변방적이고 부수적인 개념만 천착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띠삐따까에서는 닙바나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혀 여겨지지 않는 보디삿따 개념은 대승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져요. 즉,
우리가 스스로 무엇이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변방적 개념인지를 구분하려면, 그 과정은 절대적으로 띠삐따까라는 1차 텍스트 내에서 이루어져야 해요. 2차 텍스트들, 특히 대승 경전들과 청정도론을 포함한 후기 주석서들은 신뢰할 수 없어요. 주석서나 이후에 산스크리트어로 인 경전들은 본래의 체계를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루빠와 루빡칸다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https://puredhamma.quv.kr/71
님 근데 처음부터 이거 보기 너무 빡센데 입문은 어케 합니까
입문은 여기서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것을 추천함
https://puredhamma.quv.kr/sutta-interpretations
나까야 아함경은 부분과 전체가 아니라 번역된 언어 차이임. 동남아로 전파된 게 니까야, 중국으로 가서 번역된 게 아함경. 당연히 거의 비슷하고 약간 차이가 있으.
일단 <불교 - 과학시대의 종교>, 마성스님의 <사캬무니 붓다>, 일묵스님의 <사성제>, 각묵스님의 <초기불교이해> 순으로 한 번 읽어보자. 아님 바로 경전부터 보고 싶으면 전재성 역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빠다)>이 그나마 쉽고 명료하면서 좋은 말들이 많아 괜찮지 않을까 싶음. 갠적으론 <법구경>을 가장 좋아하구.
윗 갤러 주장이 틀렸다는게 아니고, 비법과 정법을 가려주실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현재의 우리에게 있어서 후대 주석서들과 대승경전을 신뢰하고 말고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공부해보고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함. 윗 갤러의 주장도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 내린 결론일 거고.
음.. 혹시 그 불교 플로차트 이야기 하는 거면 그거 만든 사람임이 본인임. 당신 말이 맞음. 결국 스스로가 결정내려야 할 일이고, 결코 남이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함. 내가 요즘 고민하는 게 이 지점임. 내가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은 옳지 않음. 진리는 설득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임.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된 담마를 접할 기회는 정말 드물고
그렇기에 이번 생에 진실된 담마를 배우는 데에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음. 최근에 마하깟싸빠 상윳따에서 청정한 설법의 기준에 대한 경을읽었는데,꽤읽을만한것같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satobom&logNo=220916265147&navType=by
이 링크에서 8번부터 보면 청정한 설법에 대한 기준이 나오는데, 타인이 나로 인해 믿음을 갖기를 하는 마음으로 설하면, 그것은 청정하지 못한 설법이라고 되어 있음. 나는 이것에 정말로 깊이 동의함. 그렇다면 청정한 설법은 무엇이냐 하면, 담마의 여섯가지 덕성을 숙고하여 담마는 본래부터 수승하고 진리임을 보고, 판단은 듣는 자에게 맡기되 그들에게 자애와 연민
을 가지는 것임. 그래서 나는 담마 자체를 간소화하여 쉽게 전달하는 방식은 애초부터 그릇된 접근이라는 결론을 내렸음. 그것은 단지 제2, 3의 대승을 만들어낼 뿐임. 결국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 스스로가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장려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졌네.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음. 자애명상을 되새기게 되네.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하기를. 다치지 않기를. 아프지 않기를. 퇴락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번뇌가 없기를. 그리고 스스로 닙바나를 향해 나아갈 기회를 얻기를.
그 플로우차트를 님이 만들었고, 또 '퓨어담마'를 접하게 됨으로써 플로우차트를 수정한 것도 알고 있음. 그러나 님이 불교를 '퓨어담마'로 처음 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초심자들이 개론서부터 읽으면서 불교를 차츰차츰 배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그러는게 맞다고 봄.
님이 스스로 공부해서, 뭐가 맞고 틀린지 스스로 분별해서 '퓨어담마'를 정법으로 판단했듯이 말임.
어떤 입장인지 알 것 같네요.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일반인이 퓨어담마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부분을 최근 들어서 느끼고 있어요. 차츰차츰이라는 방식의 무게를 알아가고 있어요. 그렇기에 선생님의 말씀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어요. 깊게 생각해볼만한 거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