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서시나 별 헤는 밤으로 유명한 윤동주 시인은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임.
다른 대표작에 비해 좀 생소할 수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난 윤동주 시 중에서 팔복을 가장 좋아함.
시는 되게 간단함.
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글자 그대로 8개의 복이라는 뜻의 팔복(八福)은 사실 성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내용임.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가르침인데, 믿는 사람들이 누릴 여덟가지 복을 얘기하고 있음. 원문은 이러함.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윤동주는 8개의 문장을 전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로 바꿔 버렸음.
윤동주의 친필원고를 보면 마지막 문장을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라 썼다가 지워버린 것을 볼 수 있음.
그 말은 차마 쓸 수가 없었을 거임. 윤동주가 보기에 당시 조국의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앞으로도 오직 영원한 슬픔밖에 없을 거라 느껴졌을 지도 모름.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는데 우리는 언제 위로를 받지? 위로를 받을 날이 오긴 할까?
그 대신 윤동주는 묵묵히 현실을 적기로 함. 차마 쓸 수 없었던 바람을 담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독할 정도로 끝없는 슬픔 속에서
혹시라도 올지 모를 만약을.
윤동주의 시를 한 단어로 정의내리라면 아마 ‘부끄러움’일 것임.
그만큼 윤동주의 작품들을 보면 거의 자기반성, 자기연민이 빠지지 않고 나옴.
윤동주가 실제로 이육사처럼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독립의 의지가 넘치는 저항시를 쓰진 않았지만
이 청년은 항상 소극적인 자신을 부끄러워했음.
결국 일본 경찰한테 체포된 후 독립을 겨우 반년 남겨놓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는데
뭐 일각에서는 생체실험으로 죽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차치하고,
윤동주의 성격과 당시 현실을 알기에 윤동주가 무슨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까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짐...
일화같은 것도 들어보면 글쓰는 스타일도 그렇고 참 예쁘고 고요하고 슬픈 청년임...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집 다시 정독하러 간다.
근데 윤동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성경절 비트는건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좀 불경스러운 행위 아닌가?
좋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