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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르트르 <구토> 읽고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혼자 여러가지 찾아보면서 쓰고 블로그 같은 데 올린 리뷰인데 좀 길어서 올려도 되나 모르겠넹. 일단 나눠서 올려봄 ㅋㅋㅋ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저(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리뷰는 주관적인 내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문학이나 철학적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지금 쓰는 글도 내가 <구토>를 읽고 깨달은 점, 스스로(즉 주관적으로) 해석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몇몇 해설이나 평론을 찾아 읽으며 전문가의 글을 참고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구토>의 텍스트와 관련 해설, 평론들을 내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해 2차 가공을 거쳐 글로 써내는 만큼 절대적인 정답이 아닐뿐더러 어느 정도 공인되고 인정된 해석이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구토>가 사르트르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적 해석을 허용하는 장르인 소설이라는 점,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구토>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찾아 읽은 해설과 평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개하고픈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많은 부분들에 대한 이해가 불명확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알기 쉽게 <구토>를 풀어내는 것이 이번 리뷰의 목표이다.
1. <구토>의 줄거리
<구토>는 주인공, 앙트완 로캉탱의 일기이다. 그는 프랑스 부빌시에 머물며 역사 속 인물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고 있다. 로캉탱이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 어떤 변화를 파악하고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정확하게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p.11)라고 로캉탱은 일기 작성 직전에 쓰인 날짜 없는 쪽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토'이다.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던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매끈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어떤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돌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한 불쾌한 느낌은 이후 계속 반복된다. 카페에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줍다가, 자신의 손을 보면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독서광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하면서. 로캉탱은 수없이 반복되는 그 불쾌한 느낌을 '구토'라고 말하면서 왜 '구토'가 나타나는지, '구토'는 어떤 변화에 의해서 촉발되는지, 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한 '구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구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로캉탱이 지속적인 '구토'에 대한 사유와 관찰을 통해 '구토'가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작성을 그만두고 철저히 자신의 통제로 만들어진 필연성의 산물,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2. '구토'란 무엇이며 왜 나타나는가?
로캉탱은 '구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주변을 관찰하며 분석하지만 '구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얼핏 보면 '구토'는 무작위 하고 일관성 없이 나타나는 듯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카페에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며, 아돌프의 자줏빛 멜빵을 보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주우려다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구토'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기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캉탱은 ''구토'는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 나는 '거기에서', 벽 위나 멜빵에서, 그리고 온갖 내 주위에서 그 '구토'를 느낀다.'(p.44)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구토'는 로캉탱의 주위,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로캉탱 내부의 변화에서 야기된 것이다. 로캉탱이 주위를 인식하는 감각의 변화, 주변의 온갖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확연히 느끼게 되면서 '구토'가 나타난다. 즉, 로캉탱 자신이 외부를 인식하는 과정의 변화가 '구토'라는 반응으로 귀결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주변의 사물, 혹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하다는 사실이 왜 '구토'라는 불쾌하고 직접적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인간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고 '속성과 본질을 파악해 범주를 나누며' 그것들에 주관적인 '필연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단어를 보자. '의자'는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 보통 뒤에 등받이가 있고 종류가 다양하다.'라고 정의된 어떤 사물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물건을 '의자'라는 단어이자 기호로 지칭하고 서로 그에 대한 범주와 의미를 약속한다. 인간에게 '의자'라는 사물은 '의자'라는 언어로 규정되고,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특정한 사물을 '의자'로 분류한다. 또한 '의자'는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므로 사람이 앉기 위한 사물이라는 의도, 필연성,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로캉탱은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변에 대해 인식함으로써 '구토'를 겪게 된다. 로캉탱의 주위에 대한 인식, 즉 '구토'를 일으키는 원인을 파악해보자.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를 가지고 설명해보자면 지금 이 문장 안에 나는 '의자'라는 단어를 썼고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각각 머릿속으로 '의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 수많은 '의자'들이 전부 정확히 같고 동일한 '의자'일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나무로 된 의자를, 누군가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누군가는 지금 앉아 있는 푹신한 소파를 떠올릴 것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사실 정확한 단어가 아니다. '의자'라는 단어를 통해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사물을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의자'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의 경계는 정확히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점이 생긴다. 어디까지가 '의자'일까? 다리가 네 개고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물체? 사람이 뒤집어진 박스 위에 앉아있다면 그것을 '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등받이의 유무와 '의자'라고 지칭되는 사물의 범주는 관계가 있는가? 만약 다리가 네 개가 아니고 세 개라면? 열 개나 혹은 한 개뿐이라면? 이렇게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가 정확한 경계와 범주를 가지고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두루뭉술한 정의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정의마저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여태까지 아무도 앉지 않아서 '의자'라고 불리지 않았던 어떤 것에 누군가 앉기만 한다면 그 사물은 이전부터 '의자'였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그때부터 '의자'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절대적이고 정확하게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며 인간의 생각, 관념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현실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의미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심지어 지금 상태에서 '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전부 증발해버린다고 해도 여전히 '의자'라고 불렸던 사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들이 '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상관없이, '의자'라는 기호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내가 그 위에 앉아 있는 물건, 내가 그 위에 손을 얹은 물건의 이름은 의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에 앉을 수 있도록 서둘러서 그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죽이나 용수철, 천을 가져다가 의자를 만든다는 관념을 품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이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 그것은 의자가 아니다.'(p.234) 라거나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p.235)라고 말한다.
게다가 우리는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을 정확히,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없다면 당신이 매일 앉는 어떤 '의자'를 상상해보라.) '의자'를 한 번 완벽히 이해해보자. 다리가 몇 개인지, 등받이가 있는지, 재질은 무엇인지, 바퀴는 있는지 없는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정말로 더 파악할 것이 없는지 질문해보라. 분명 놓친 것이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지, 단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사실 '의자'라는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자'를 만들어 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자'가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왜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사물로써 정확히 저러한 모양과 재질, 무게, 길이의 사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조차도 왜 등받이 길이를 50cm로 했는지, 51cm나 49cm면 왜 안 되는 건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만든 '의자'조차도 완전한 필연성 속에 놓이기에는 그 외의 설명되지 않는 '여분'이 너무나 많다. '의자'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필연성을 지닐 뿐, 현실에 사물로서 만들어지는 순간 필연성은 사라져 버린다. 즉, '의자'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실 어떤 속성이나 본질,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들을 지칭하는 언어며 기호, 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존재들의 의의, 사용법, 특징 등은 우리가, 그리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안에서 절대적인 어떤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어떤 존재를 기만적으로, 오만한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자신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인식한다. '3,4일 전만 해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코 예감하지 못했다.'(p.237)라고 말한 그는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p.238)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초록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어떤 속성이 존재하고 그 속성으로 '바다'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로캉탱이었지만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의 특징들을 파악하고 설명해보려고 하다 실패한다. '껍질이 그래도 검은 것을 나는 보았다. 검다니? 나는 이 말이 부풀어올라서, 엄청난 속도로 그 의미가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다니? 뿌리는 검지 '않았다'. 그 나무조각 위에 있었던 것은 조금도 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원과 마찬가지로 검은 빛깔도 존재하지 않았다.'(p.243)라는 말에서 보듯이 마로니에 뿌리껍질이 검다고 말하려던 로캉탱은 사실 진정한 '검은 빛깔'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마치 완전히 관념적인 단어, 존재의 세계가 아닌 설명이나 이치의 세계에 존재하는 '원'과 같은 단어처럼 말이다. '원은 부조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원은 직선의 일부분이 그 끝에서 회전한 것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은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다.'(p242)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모든 언어와 단어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 필연성을 지니며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순간 그냥 존재하고 있는, 이해와 표현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사물들이 된다. '역부 회관의, 그날 밤의 아돌프의 멜빵. 그것은 바이올렛빛이 '아니었다''(p.243) '맥주잔의 그 애매한 투명.'(p.244)처럼 로캉탱은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언어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캉탱은 그러한 주위의 사물들의 부조리와 우연성을 앞에서 말했듯 '여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p.240)라는 로캉탱의 말을 보자. 여기서 '여분'은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부분을 말한다. '의자'는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꼭 다리가 4개에 등받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모양의 사물이더라도 앉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의자'다. '의자'를 만든 사람이 전혀 누군가 앉을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앉는다는 행위와 전혀 관련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의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자'라고 부르는 모든 사물에는 앉는다는 행위와 관련 없는 여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등받이의 길이가 50cm라고 해보자. 등받이의 길이가 49cm이더라도, 40cm이더라도 앉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의 목적과 의도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등받이의 길이가 될 수도, 의자의 색이 될 수도, 의자 다리의 개수가 될 수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인간이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사물조차도 수많은 여분이 존재하는데 나무는, 돌은, 잔디는 어떻겠는가? 그것들은 완전한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 속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존재인 것이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 벨레다도 '여분의 것'......'(p.240)처럼 모든 것은 '여분'의 존재다. 로캉탱의 인식은 주위의 사물에서 자신, 혹은 인간의 존재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p240)나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p.240)처럼 로캉탱은 자신이나 인간조차도 어떤 본질이나 의미, 속성이 없는 '여분'의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연성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p.241)라는 문장에서 '부조리'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캉탱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 나무, 건물, 돌, 바다, 동물, 인간, 심지어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연히 의미 없이 생겨났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로캉탱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앞에는 무한한 자유가 놓여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로캉탱의 말처럼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므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엄청난 형벌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반드시 내려야만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의 선택에 대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는 당연하게도 선택의 결과와 책임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야기한다. 끝없이 펼쳐진 흰 무()의 공간에 나침반도 지도도 아무것도 없이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해보자. 로캉탱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첫째로 로캉탱의 주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것들이 쫓기는 토끼처럼 우리의 코밑을 빨리 지나갔을 때, 그리고 거기에 너무 주의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주 간단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세상에는 진짜 청색, 진짜 분홍색, 진짜 편도나 오랑캐꽃 냄새가 있다고 믿을 수가 있었다.'(p.244)는 로캉탱의 말처럼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을 슥 지나가듯 보았을 때는 그 사물의 '여분', 우연성, 적나라한 이해 불가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로캉탱은 어느 순간(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자신이 이해하고 있고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존재들이 사실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잠시나마 붙잡아 놓으면, 이 평안과 안전의 느낌은 심각한 불안에 자리를 양보한다. 빛깔, 맛, 냄새 들은 절대로 진짜가 아니었다.'(p.244)를 느끼는 순간이 로캉탱에게 도달한 것이다. 언어는 그저 인간이 만든 텅 빈 기호일 뿐 어떤 실제적 의미도 가지지 않으며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 왔던 속성과 본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식하는 존재에는 늘 '여분'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존재가 우연성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로캉탱이 당연히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의미나 본질, 속성 따위는 전혀 가지지 않은 채 존재할 뿐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이 '구토'라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인간, 그리고 로캉탱 자신의 존재가 가진 우연성과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다. 로캉탱은 모든 사물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나 근거도 없음을 즉, 모든 사물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로캉탱은 인간도 사물과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인간도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근거도 없다. 로캉탱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겼고, 왜 머리가 붉은색이며, 왜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써야 되는지 그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로캉탱은 형벌과도 같은 무한한 자유 속에 놓인다. 우연히 존재할 뿐인 로캉탱은 완전히 우연한 존재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질서상으로 안된다고 생각했던,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규제했던 일들은 사실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외면하는 것이며자유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이 두려워 사회 질서와 그것을 만든 타인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로캉탱은 알게 된다. 즉, 로캉탱 자신의 삶과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없음을, 그러므로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이 무한한 선택지에서 영원히 형벌과도 같은 자유를 누리며 선택을 해나가야 함을 깨달은 로캉탱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없이 자유로운 자유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구토'로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