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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토'는 로캉탱에게만 나타나며 다른 이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구토'를 극복한 것일까?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그리고 로캉탱이 '구토'의 극복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을 알아보자.
3.1. 부빌 시의 시민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구토>에 보면 부빌 시의 시민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방문하며 거리에 온통 모자의 행렬이 이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광경은 '머리만이 그 두 줄에서 완전히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모자들, 모자의 바다가 보인다.'(p.87), '행렬의 진행은 멈추지 않는다. 겨우 약간 사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여섯 사람들 앞을 우리는 걸어간다.'(p.87),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는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인사를 한다. 모자 춤은 내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시작했다.'(p.89)와 같이 묘사된다. 부빌 시의 시민들은 일요일 미사를 보기 위해 붐비는 대로를 휩쓸려 다니듯 걷고, 아는 이를 만나면 일제히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모자 춤을 추며,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사를 나누고 비슷비슷한 복장으로 대로를 걷는다. 즉,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고민해 선택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나 사회가 정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이들은 다른 이들 혹은 사회의 규칙이나 질서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선택과 그 책임을 내맡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임무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부빌 시의 시민들은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우연성 속에 놓인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행동하며 사회 질서를 철저히 지키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자신의 직업이, 위치가, 성별이, 지위가 자기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행동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일컬어 '자기기만'이라고 명명했다. '이미 지나간 일요일은 씁쓸한 맛을 그들의 입 안에 남겼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p.106)라는 문장이 로캉탱과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일요일과 월요일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요일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질서에 자신을 맡기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평소와 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로캉탱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그저 밀려오는 새로운 나날일 뿐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라는 가상의 관념으로 정의되는 날이 아니며 7일 전의 일요일이나 월요일과 같은 날이 전혀 아니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이 추구하는 안정된 삶, 일주일 단위로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는 삶, 늘 새로운 날임을 외면하며 사회에서 만든 가상의 가치에 안주해버린 삶이 로캉탱이 깨달은 무한한 자유 속 인간의 삶, 존재함을 깨달은 인간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자유를 책임질 노력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일조차 없이 사회에서 준 직책, 지위, 역할에 몰두한 자들을 초상화로 남겨 기념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자유를 방임한 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면해 버린 자,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며 자신의 본질이, 의무가, 사명이 존재한다고 여기던 자들의 그림을 보고 로캉탱은 말한다.'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p.178)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올바른 선택을 찾아내고, 그 올바른 선택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무한한 자유를 외면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설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막중한 책임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 사회 질서로 정해진 월요일이기 때문에 출근하며,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사회가 정한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자신의 자유를 외면한 채 거짓 근거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임무나 사명, 의무인 것처럼. 그러나 그 속을 끈질기게 파고들어본다면 그 행동들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근거는 없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규칙적이고 정해진, 평안한 삶에 안주할 뿐 그 삶의 방식이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 속에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자신에게 선고된 무한한 자유에서 눈을 돌린 부빌 시의 시민들은 당연히 '구토'를 겪지 않는다. '구토'는 존재의 '여분'에서 깨닫는 세상 모든 것들의 우연성,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져 존재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무한한 자유를 직시하고 그것의 두려움을 체감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3.2. 독서광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독서광은 도서관에서 알파벳 순으로 모든 책을 읽어나간다. 그는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드려 노력한다. 하지만 책은 과거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답도 줄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로캉탱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자신의 '구토'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p.180),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p.180)처럼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며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기록으로 점철된 책들이나, 이미 사라진 과거의 존재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현재의 로캉탱이나 독서광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재의 존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과거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영어 문제를 수식을 이용해서 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캉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르봉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뼈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뼈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에 불과하다.'(p.182). 이처럼 현재를 과거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를 보고 "로르봉 후작님, 잘 지내셨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독서광은 로캉탱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사회주의 단체 S.F.I.O. 에 입당했음을 밝힌다. 그때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난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는 순교자처럼 보였다.'(p.216)고 로캉탱은 묘사한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보인다. 로캉탱은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p.222)라고 말하는 독서광에게 일침을 가한다. 로캉탱은 독서광에게 "당신이 저 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들은 상징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이 흐뭇해하고 있는 그것은 전혀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청춘' 특히 '남녀의 사랑' '인간의 목소리'지요."(p.224)라고 말한다. 독서광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것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행동, 지금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입당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주의가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과거의 깨달음과 과거의 경험을 따른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 그 자체인지, 로캉탱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청춘'이나 '남녀의 사랑' 혹은 '인간의 목소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런 독서광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우연성, 존재의 '여분', 지금 이 곳에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깨달으며 생기는 불안감이 형상화된 '구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란 현재에 있는 것이지만 독서광은 과거에 묻힌 자이기 때문이다.


3.3. 안니가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사실 안니는 로캉탱과 같은 '구토'라는 현상을 겪지 않을 뿐, 어렴풋이 로캉탱과 비슷한 불안감,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 과정은 안니가 자신이 추구해오던 '완전한 순간'이 허상임을 깨달으면서 나타난다. 안니는 로캉탱과 만나던 시절에도 늘 '완전한 순간'을 추구했다. 일상을 벗어난 특권적인 상태에 이른 어떤 한순간에 그 공간, 그곳에 속한 인물, 그들의 행동 등을 통제해 마치 스틸컷을 찍듯 완벽한 질서를 부여한 '완전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안니는 어느 순간 그 '완전한 순간'이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완전한 순간이 없단 말이야?" "없어요."'(p.267)가 보여주는 로캉탱과 안니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니가 '완전한 순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로캉탱이 '구토'를 겪으며 깨달은 사실, 세상 모든 존재가 어떠한 존재 이유나 근거가 없는 우연성 안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그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해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에 필연성,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 근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안니 자신이 명확하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닐 테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피상적으로 느끼던 불안감이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해소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에서 안니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순간'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순간이 가지는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3.2.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는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만약 안니가 추구하던 '완전한 순간'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 순간은 현재에도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현재에 완벽히 재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 공간, 인물, 위치, 기억 등등 온갖 요인들이 달라졌고 '완전한 순간'에 포함되어 있던 것들은 현재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러므로 '완전한 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현재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잊고 또한 미래에도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은 그 순간이 지나는 그때 이미 사라지고 완전함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안니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떠올리고 그것에서 현재의 고뇌와 불안을 잊으려 해도 안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완전한 순간'은 그 당시의 한 부분이자 현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다. 게다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해도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니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한다. "나는 일종의 물리학적...... 확신이 있어요. 완전한 순간이란 없는 것 같아요."(p.268)라고. 안니는 '완전한 순간'의 허상을 깨달았으며 만물이 가지고 있는 우연성과 혼돈의 세계를 직면했다. 그녀는 과연 어떤 해답을 찾게 될까.


3.4. 로캉탱이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


로캉탱은 부빌의 카페에서 격렬한 '구토'를 느끼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곡을 들으며 '구토'가 사라지는 걸 느낀다. 재즈곡이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음악이 시작되고 정확히 몇 초 후 흑인 여자가 노래를 시작하고 정해진 가사와 음과 시간이 소비되면 노래가 멈추고 음악이 끝난다.'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p.48)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이 재즈곡은 철저히 작곡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여 있다. '일어난 일, 그것은 '구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내 몸이 굳어지고 '구토'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p.49)에서 보듯 재즈곡은 로캉탱의 '구토'를 그 즉시 잠재웠다. 이처럼 작곡자의 철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여분'이 없는 완벽한 필연성의 산물인 재즈곡은 존재 이유가 없는 존재들의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구토' 증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기 전 같은 카페에서 같은 재즈곡을 들으며 다시 한번 재즈곡의 완전한 질서, 필연성을 체감하고 곡을 부른 가수와 작곡가를 생각한다. 그들이 음악 속에 남긴 생각, 관념, 필연성, 질서는 그들이 이미 사라진, 현존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로캉탱이 그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나는 7월의 어떤 날, 어두운 자기 방의 더위 속에서 그것을 작곡한, 저쪽의 그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 멜로디를 '통해서', 색소폰의 희고 시큼한 소리를 통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p.327)처럼 말이다. 또한 로캉탱은 '그런데 내가 그들을 다정하게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p.328)라고 말한다. 작곡가와 가수, 그들은 무의미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임에도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완전한 필연성, 존재 이유를 가진 산물인 재즈곡을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연성과 무의미에 속한 것들 사이에서 필연성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즉, 그들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로 태어났지만 필연성과 질서를 가진 산물을 창조해냈고 그로 인해 우연성에서 태어난 그들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지도록(존재 이유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로캉탱은 그 과정에서 '구토'의 극복 방법을 찾아낸다.


로캉탱은 자신의 글 쓰는 능력을 이용해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한다. 단 지금까지 쓰던 로르봉 후작의 전기나 역사책이 아닌 소설을 쓰기로 한다. '역사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한 존재는 결코 다른 존재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p.329)는 이유 때문이다. 로캉탱은 철저히 자신의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투안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들빈들 드나들던 머리칼이 붉은 놈이었다"라고.'(p.330)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로캉탱의 손에서 쓰인 한 권의 소설, 즉 로캉탱이 의도한 질서와 필연성 안에 놓인 소설은 영원히 그 존재가 남을 것이고 로캉탱은 영원히 그 존재 이유를 지닌 소설의 창작자로서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서 자신의 의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가 된다. '구토'는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우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므로 그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간 극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캉탱은 소설 쓰기를 통해 '구토'를 극복하려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재즈곡이 녹음된 CD나 로캉탱이 쓴 소설책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CD나 책 같은 사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창작자의 관념, 사상 그리고 창작자가 의도한 질서와 창작 이유, 의미이다. 음악은 음표로 표시된 악보, 혹은 녹음된 CD나 음악 파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음악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창작자의 머릿속, 그리고 그 음악을 들은 청중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이 쓰인 책이 곧 그 소설인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창작자의 머릿속과 독자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글자, 혹은 책 그 자체가 소설이 아니다. 악보나 CD, 책이나 글자는 창작자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음악과 이야기, 즉 생각의 산물을 현실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 현존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원이나 검은 빛깔은 관념의 세계 속에서는 충분히 이치에 맞게, 필연성을 지니며 설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우연성 속에 놓인 현실 세계에서, 창작자는 관념 속 필연성을 지닌 어떤 것들(음악, 소설)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도록 만듦으로써 필연성을 지닌 존재를 현실 세계, 존재의 세계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4. <구토> 리뷰를 마치며.


며칠에 걸려서 문헌들과 책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썼지만 지금도 제대로 쓴 것인지 걱정이 든다. 사실 <구토>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의문이다. 절반이나마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토>에 드러난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절대적 존재의 이유를 부여하던 신이 과학에 의해 부정당하고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이며 우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로캉탱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구토>의 결말은 인간은 우연성 아래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필연성,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변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내 삶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지 <구토>를 통해 깊게 고민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