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1

존 가드너는 소설의 기술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음.

적어도 장편을 쓰는 소설가는 형이상학에 골몰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질서가 보이지 않으면, 

사실 독자 입장에서 계속 읽어나갈 이유를 못 느끼기도 하니까.


평론가 제임스 우즈는 

문학적 인물의 생명력이 눈에 보이는 극적 행위나 신빙성보다는

좀더 큰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의미, 인물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무언가 심오한 것이 걸려 있다는 독자들의 인식과 더 관련이 있다고 말했는데,


나보코프가 작품을 읽을 때 그러한 독법을 싫어했다는 걸 우린 알고 있지만,

성공적인 '장편'에 속하는 롤리타에서도 그러한 질서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음.

롤리타는 갤에서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함.


험버트는 자신의 감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금단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인물임.

그리고 험버트는 법에 속한 사람들에게 매번 위협을 느낀다. 그러니까 법이라는 게 대체 뭐냐?

그것은 말 그대로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적 가치로 만들어진 체계를 뜻하는 것임.

이것 또한 나보코프가 싫어하겠지만, 나는 험버트라는 인물에 작가의 의지가 아주 많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함.


실제의 형태에 집착하는 유미적인 (형이하학적) 인물인 험버트가

실제적이지 않은 형이상학인 법과 제도 등과 대립하는 것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지. 그리고 그 대립 사이에 놓인 것이 바로 돌로레스일 테고.



2

서양 소설은 플로베르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다고 하는데,

현대에 와서 유행한 메타픽션을 소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도전이라고 한다면,

자연히 묘사적 측면에 골몰해서 문체를 발전시키려 하는 건 형이하학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겠음.

어떻게 현실의 세계를 (마음이 아닌) 독자의 눈에 보여줄 것이며,

그러니까 어떻게 세부사항으로 메꿔서 거기에 현실과 같은 생동감을 부여하느냐, 

거기에 바로 플로베르의 성취가 있는 것임.


플로베르 이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현대 소설가는 없다고 봐도 좋은데,

나보코프 또한 그의 계승자들 중 하나에 속하겠지. 그의 계승자들에게 이상적인 글쓰기는

주시하는 행위들로 하나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닐까 함.

계승이라 함은 사실 선대자가 보여준 무언가를 확장하거나 극대화시키는 것임.

쇼펜하우어의 생에의 의지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되었듯이.


앞서 언급했던 비평가인 제임스 우즈의 나보코프에 대한 의견을 빌려보겠음.

그는 다른 작가들의 주시하는 능력을 언급하며,

나보코프는 주시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늘 말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함.

그래서 그의 소설은 훌륭한 주시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되며,

그 소설 자체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되기도 한다는 것.


나보코프는 많은 작가들을 혹평하기도 했었지.

나보코프가 한 혹평의 핵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건 그가 문학을 바라볼 때 가장 우선시하는 것과 연관이 가장 크겠지.

그의 비판과 찬탄의 핵심은 바로 문체의 세련됨과 시각적인 기민함에 있음.

물론 여기서 시각은 순전히 실제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고.


나보코프의 혹평에 반발하는 의견들 중 하나를 들어보면,

그가 많은 작가들을 가볍게 보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세부사항을 구성하는 데 있어

궁극적으로 더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라고 함.

제임스 우즈는 소설엔 시각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존재하는데,

나보코프에겐 그런 것들을 보는 밝은 눈이 없다고 혹평함.


어쩌면 그는 좋은 문학이 나옴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가치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는 걸

롤리타란 작품으로 대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음. 


소설을 보는 관점이 나는 나보코프랑 상이해서

재독을 했지만 여전히 길게 끌고 나가기엔

개인적으로 1인칭 화자인 험버트는 입체감 있지만

단편적인 인물 같다는 아쉬움이 들긴 했음.

이러한 아쉬움은 다양한 층위로 구성이 된 도끼 소설 속 주인공들과

민족과 영혼에 호소하는 조이스의 스티븐을 대비시킨다면 이해하기 쉬울 듯.


플로베르는 자기 주변의 현실엔 눈을 돌리고

사실적이지 않은-낭만을 좇는 부인의 일화를 

조소적으로 풍자했는데,

이러한 기질은 부인이 어린 시절 수녀원에서 읽었던

낭만주의 소설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음.


어쩌면 자기 주변의 현실엔 눈을 돌리고

자기 의지를 좇는 보바리 부인 같은 기질이

다른 방식으로 극대화 되었다고도 생각이 드네.



3

1955년에 프랑스에서 출간이 된 롤리타.

그리고 1968년에 프랑스에서 이뤄진 68혁명 이후의 세계를 다룬,

1998년에 역시 프랑스에서 출간된 

우엘벡의 소립자를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 싶음.


프랑스 68혁명의 구호 중에 실제로 이런 게 있었다고 함.

- 콘크리트 밑엔 모래가 있다.

이게 바로 그 혁명의 정신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 운동의 기반엔

바로 비실제적인 가치보다 실제인 감각이 우선시되는 이론들이 있음.

그리고 이 혁명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이후 이러한 정신으로 세계 전체는 물들게 되지.


롤리타에선 험버트의 감각에의 욕구가 

제도에 의해서 위협, 억압당하는 걸 볼 수 있다면

우엘벡의 소립자에선 법과 종교, 가족 등 형이상학에 기반한 온갖 제도들이 

해체되고 감각과 욕구만이 우선시되는 세계에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볼 수 있음.


나비와 완전히 극을 달리는 우엘벡은

문체 같은 거 그냥 다 ㅈ까고 

그냥 형이상학적 체계인 정치와 사상, 현대사회 같은

거대한 담론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통찰하고 

담기 어려운 '사실적인' 문제들을 

과감하게 제기하는 걸 볼 수 있어서 

비교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요새 그렇게 읽었거든.


궁금한 작가나 작품 같은 거 있으면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고 또 다뤄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