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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말선초 성리학자인 정도전과 권근의 척불론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이 책의 일부 내용은 저자가 이전에 썼던 논문들을 정리, 보강한 것이다.


정도전은 널리 알려져 있는 정치가이자 혁명가이자 척불론자였다. 그런 만큼 정도전의 대(對)불교관은 극단적 척불론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 논하자면 1398년, 죽기 얼마 전 저술된 불씨잡변에 한해서이다.


그동안 권근의 주석에 의해 정도전 최초의 불교 비판서로 여겨져 왔던 심문천답은 정도전의 심문천답은 당시 이인임 등 구세력과 대립하여 유배 간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미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저작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오히려 정도전은 불교 승려와 적지 않게 교류하고, 불교에 대한 시를 지을 정도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비록 이색처럼 불교에 대해 관용적인 것을 넘어 ㅎ호의적인 태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생애 전반에 걸쳐 불교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대해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흑과 백으로 나눈 후 한쪽 길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7:3 6:4 이렇게 나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정도전 또한 이 부류에 ㅅ속한다.


사실 60~80년대에 이미 도식적 성격의 역사연구는 많이 이루어졌기에, 90년대 이후(특히 후반)에는 도식적 성격의 역사 연구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내려는 차원에서 숨겨진 면모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척불론자가 맞았다. 단 그러한 불교 비판론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 공양왕 3년 5월의 대대적 척불운동은 개혁파 사대부들이 자파를 견제하고자 하는 공민왕에 대항해 일으킨 정치 운동의 성격이 강했고, 불씨잡변 역시 그때까지도 위세를 떨쳤던 승려 집잔의 영향력을 축소, 억제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저술되었다.


즉 정도전의 척불론은 정치가로서 그의 입장이 표방된 것이고, 불씨잡변은 그 완성던계의 저술이었다.


심문천답, 심기리편에 주석을 달면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대표적 척불론자로 분류되는 권근 역시 개인적인 면에서는 불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정치적 위기가 왔을 때에는 불교에 의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흥유신의 일원으로서 불교를 배척하였고, 이는 오히려 권근이 왕조 개창에 반대하다 뒤늦게 왕조에 합류한 신하라는 데에서 보면 더욱 새로워진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전부터 견지해오던 척불론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삼봉집의 주석 자업으로 이어진 듯하다.


사실 권근의 진짜 업적은 성리학 사상 측면에서의 이론 체계화이다. 권근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 등을 저술하여 성리학의 사상적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이전까지의 성리학은 철학적 측면보다 경세학적 측면이 더 강했다. 하지만 권근이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편찬함으로써 이론적 측면의 성리학 발전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심성론 측면에서 주희의 학설에 의문을 품고 맹자의 영향을 받아 주희의 입장과 다른 심성론을 제시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17세기 이후의 주자절대주의적 성리학자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주자, 송시열 신봉자인 한원진에게 더욱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지눌의 심성론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조광조와 이황에게까지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권근의 한국유학사적 위치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도전은 정치, 제도적 측면에서, 권근은 사상적 측면에서 조선왕조의 기반을 마련한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