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하기는 뭐 해서 여기 올린다 반박 환영한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 신학자, 이승우론 여기 목회하는 자가 있다. 감나무를 잘라내어 직접 사포질해 만든 식탁에 앉은, 독실하게 한 생을 살아내어 회고하는 그가 있다. 그의 옆에는 신학도가 자리한다. 천부적으로 고결하되 자폐적이고 외연적 종자가 보기에는 괴이쩍되 입을 닫는 자이다. 그는 일례의 아비 잃은 소년이며 패배하지 않고 활을 든다. 아비의 죽음이 기인하는 것이다. 그들의 또는 그런 이들의 일화는 적시되지 않은 선사이다. 이것이 적시되려면 본의를 잃지 않은 채 구전으로 돌아다녀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지 않을 시에는 오로지 한 사람. 자를 마주 앉아 보는 거울 속의 사람이 알아야 한다. 애시당초 그의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글에서 비추는 신학도는 무정형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다. 그가 알을 깨려면 기투 그리고 타자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기이해적 고독은 어디에서 볼 수 있으며 어느 곳에 남겨져 자리하는가. 여기서 남겨졌다는 의미를 우리는 일말의 타성 없는 절대고독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타성이 무엇인지를 그의 인물들은 선험할 도리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이견을 내놓자면 이미 ‘모르는 사람들’을 규정지은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연인이 될 수 있었을 듯싶다. 규정하지 못한 바는 그의 말들을 인용하자면 소설가는 모르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쓰는 사람이며 끝내 알지 못할 것일 때문이다. 세태에서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말인즉 인맥 관리 그리고 평가 관리에 치중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렇도록 이승우의 고찰은 타인을 밀어 두지 않는다. 어느 타인조차도 받아들일 수가 부재한 그의 특질 탓에 있다. 그의 인물들은 타인을 부러 거절하지도 않는다. 다만 짐짓 관심을 둘 수 없는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다. 연기는 눈속임으로써 바람직한 질료가 된다. 그의 모친을 제외하고 말이다. 모친은 어느 방, 그 방으로써 태아의 존재태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 거절에서 돌출되어 나오는 타자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단독자의 모친을 떠올리자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캉탕에 등장하는, 자궁과도 같은 어느 암실이다. 이 암실은 천장이 낮은 회랑이며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살해로 인한 또는 작위적 자살로 인한 죽은 아들은 피에타로서의 그것이 생의 이면에서부터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모정에 대한 희곡으로 시달린 이유와도 같아 읽는 이로 하여금 슬픈 욕심을 자극케 한다. 이는 각성한 아들의 어머니 서사로 회귀하는 불친절한 이승우의 소설에 대한 반박이며 요지이다.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적 사드는 마치 거대하고 넓은 동굴과도 같아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모친의 원초적 쾌고를 갈음하기를 원하고 이에 더해 원하도록 느낀다. 여기서 원하도록의 느낌은 인위적인 것이며 인위라 함은 생각을 번복하고 돌아설 때의 비로소의 신생아로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틀을 갖추면 비로소 다른 껍질에서 탈각당함을 말한다. 생의 이면에서 묘사하듯 주인공은 신을 통하여 나르는 높고 먼 곳을 향함이 아니라 그것은 짐 진 자로써 멀게 가는 상자와 같은 공간도 아닐진대 그것의 대상이 연상의 여인이라는 점에서 혼란해하는 남짓 괴로워한다. 어찌해서 그는 희며 두터운 알을 깨려 쪼았을까?그는 어찌해서 소돔의 두 딸보다 이웃을 사랑하였는가?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인물들이 순진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났던 탓이 아닌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이승우 비평과 이승우 소설에서 잦게 조명된다. 그들은 여성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조숙이 이루어진 청소년을 생각하며 대화한다. 정서적 조숙이 된 주인공 싱클레어는 몸피를 부풀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외연적 존재가 없음과 결부할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급우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탄생을 각성으로 읽을 수 있는 바인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생활에서의 잠언들은 우리의 양태를 만들기에 별다를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 일종의 죽음과 애도를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 일말의 자학감도 없이 저지르거나 용기를 만용으로 착각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든다면 수도 없이 많겠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구속되는 정의 따위와는 무관하다. 자의만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다. 탄생은 태아가 갖춘 필수 요건이며 신생아로 자라날 수 있는 일괄의 목적이다. 동시에 세대성을 띌 수 있는 가치이며 고통이다. 반면 각성은 계기로 인한 깨우침에 불과하다. 이승우는 단독자로서 탄생하는 것이지 각성하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그는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로 멈춤으로써 인간으로 직립보행하는 자인 것이다. 신이 도래할 날을 기다릴 이승우 소설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 신학자, 이승우론 여기 목회하는 자가 있다. 감나무를 잘라내어 직접 사포질해 만든 식탁에 앉은, 독실하게 한 생을 살아내어 회고하는 그가 있다. 그의 옆에는 신학도가 자리한다. 천부적으로 고결하되 자폐적이고 외연적 종자가 보기에는 괴이쩍되 입을 닫는 자이다. 그는 일례의 아비 잃은 소년이며 패배하지 않고 활을 든다. 아비의 죽음이 기인하는 것이다. 그들의 또는 그런 이들의 일화는 적시되지 않은 선사이다. 이것이 적시되려면 본의를 잃지 않은 채 구전으로 돌아다녀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렇지 않을 시에는 오로지 한 사람. 자를 마주 앉아 보는 거울 속의 사람이 알아야 한다. 애시당초 그의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글에서 비추는 신학도는 무정형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다. 그가 알을 깨려면 기투 그리고 타자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기이해적 고독은 어디에서 볼 수 있으며 어느 곳에 남겨져 자리하는가. 여기서 남겨졌다는 의미를 우리는 일말의 타성 없는 절대고독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타성이 무엇인지를 그의 인물들은 선험할 도리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이견을 내놓자면 이미 ‘모르는 사람들’을 규정지은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연인이 될 수 있었을 듯싶다. 규정하지 못한 바는 그의 말들을 인용하자면 소설가는 모르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쓰는 사람이며 끝내 알지 못할 것일 때문이다. 세태에서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말인즉 인맥 관리 그리고 평가 관리에 치중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렇도록 이승우의 고찰은 타인을 밀어 두지 않는다. 어느 타인조차도 받아들일 수가 부재한 그의 특질 탓에 있다. 그의 인물들은 타인을 부러 거절하지도 않는다. 다만 짐짓 관심을 둘 수 없는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다. 연기는 눈속임으로써 바람직한 질료가 된다. 그의 모친을 제외하고 말이다. 모친은 어느 방, 그 방으로써 태아의 존재태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 거절에서 돌출되어 나오는 타자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단독자의 모친을 떠올리자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캉탕에 등장하는, 자궁과도 같은 어느 암실이다. 이 암실은 천장이 낮은 회랑이며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살해로 인한 또는 작위적 자살로 인한 죽은 아들은 피에타로서의 그것이 생의 이면에서부터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모정에 대한 희곡으로 시달린 이유와도 같아 읽는 이로 하여금 슬픈 욕심을 자극케 한다. 이는 각성한 아들의 어머니 서사로 회귀하는 불친절한 이승우의 소설에 대한 반박이며 요지이다.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적 사드는 마치 거대하고 넓은 동굴과도 같아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모친의 원초적 쾌고를 갈음하기를 원하고 이에 더해 원하도록 느낀다. 여기서 원하도록의 느낌은 인위적인 것이며 인위라 함은 생각을 번복하고 돌아설 때의 비로소의 신생아로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틀을 갖추면 비로소 다른 껍질에서 탈각당함을 말한다. 생의 이면에서 묘사하듯 주인공은 신을 통하여 나르는 높고 먼 곳을 향함이 아니라 그것은 짐 진 자로써 멀게 가는 상자와 같은 공간도 아닐진대 그것의 대상이 연상의 여인이라는 점에서 혼란해하는 남짓 괴로워한다. 어찌해서 그는 희며 두터운 알을 깨려 쪼았을까?그는 어찌해서 소돔의 두 딸보다 이웃을 사랑하였는가?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인물들이 순진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났던 탓이 아닌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이승우 비평과 이승우 소설에서 잦게 조명된다. 그들은 여성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조숙이 이루어진 청소년을 생각하며 대화한다. 정서적 조숙이 된 주인공 싱클레어는 몸피를 부풀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외연적 존재가 없음과 결부할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급우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탄생을 각성으로 읽을 수 있는 바인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생활에서의 잠언들은 우리의 양태를 만들기에 별다를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 일종의 죽음과 애도를 동시에 하는 사람들이 일말의 자학감도 없이 저지르거나 용기를 만용으로 착각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든다면 수도 없이 많겠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구속되는 정의 따위와는 무관하다. 자의만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다. 탄생은 태아가 갖춘 필수 요건이며 신생아로 자라날 수 있는 일괄의 목적이다. 동시에 세대성을 띌 수 있는 가치이며 고통이다. 반면 각성은 계기로 인한 깨우침에 불과하다. 이승우는 단독자로서 탄생하는 것이지 각성하지 않는다. 결과론적으로 그는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로 멈춤으로써 인간으로 직립보행하는 자인 것이다. 신이 도래할 날을 기다릴 이승우 소설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글 드럽게 못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