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c63f4214e95

어릴 적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막연한 인문학이 결코 답을 내려주지 못하던 부분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하고도 근거 있는 해설을 풀어준 것이다. 사람은 딱히 착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물론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할 만큼 착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이고 싶어할 만큼 악하지도 않다. 이 전제는 일반적인 통념 이상으로 강력하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물론,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를 포함해서) 전자에 대해선 흥쾌히 동의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리라.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지만, 자기를 죽이려드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고. 이 행동을 동기론적으로 선악 판별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느냐는 둘째치더라도, <살인의 심리학>은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을 시사한다: 이 문제는 선악이라는 간단한 잣대가 인간 의식의 본질을 대체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좋은 예시다.



다만 애석하게도 당시에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 비디오 게임이 아이들을 살인에 무덤덤해지게 만들며 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서술에서 반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감흥은 기억 속에서 천천히 퇴색되며 최근 이 책을 다시 떠올리고 집어드는 순간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참신한 시각의 책' 정도의 연상만 남았다. 아마 당시 한국에서 주로 이야기가 나오던 게임의 폭력성 유발에 대한 논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그런 거부 반응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주제에 대해선 여전히 같은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게임은 딱히 폭력성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치로까지 북돋구지 않는다. 2021년이 끝나가는 지금 봐도 전반적 데이터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 주장하는 바가 사실 이 논쟁과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이 전혀 다르고, 사실 방향조차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살인의 심리학>을 재독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진 않다. 현대사와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내가 막연하게나마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적 토대들이 기실 그리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보편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평화와 평화 사이의 전쟁 대신 전쟁과 전쟁 사이의 평화라는 전제를 선택한다면 이해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알아보고 싶었다. 살인이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정당화되는 사회는 어떤 양상을 띠고, 그 안에서 개인은 대체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가, 등의 주제들 말이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재독한 이 책은 한 때 잊어버리고 말았던 내 어릴 적의 깨달음을 다시 불러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문제로 돌아가보자. 자기를 죽이려드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 대해 뭐가 그렇게나 문제란 말인가? 보통 이 주제를 들은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 윤리니 뭐니, 또는 자기 보호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도덕 교과서 지문을 읽었을 때의 반응 말이다. <살인의 심리학>은 이렇게 앞뒤를 반복적으로 감시하며 지루하다는 듯 늘어져 있는 독자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들어온다. 전제 자체가 틀렸다.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의 문제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려드는 사람조차도 쉽사리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을 상황에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들었음에도.



일반적인 전쟁에 대한 통념과는 달리, 두 집단의 전투 중에는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대전 중의 조사에 따르면 소총을 소지하고 있던 병사의 15~20% 정도만이 그 전투에서 총을 쐈고, 그나마도 상당수가 사람을 똑바로 겨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결과는 전쟁 중의 혼란으로 인한 실력 미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지만, 이 책은 개별 사례와 여러 근거들을 토대로 '실력 미비'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실체를 끄집어낸다. 일반적인 상황의 사람은 결코 쉽사리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어떤 고통도, 삶에 대한 집착도 결단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려 이 살인의 결정은 살해자의 정신적 상태로부터 나온다. 이 상태가 위 자료를 해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역사적 사료나 원시 부족들의 전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두 집단의 직접적 전투는 대체로 대치 상태만을 유도할 뿐이다. 서로를 위협하고, 상대가 기세에 눌려 물러나기만을 기다리느라 무기의 살상력이 떨어지고 실제로 딱히 상대를 제대로 겨낭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쪽이 물러나 도망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이 때 병사들의 교감 신경은 극도로 활성되며,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가 되고, 이성적인 양심은 그 뒤로 몸을 숨긴다. 이 떄 상급자의 권위 있는 명령, 소속된 집단으로부터의 죄의식 희석, 피해자와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가 확보된다면, 뒤쫓는 병사들은 저 도망치는 집단을 제대로 살육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발견한 현대군은 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더욱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는 베트남전에서 95% 가량의 병사들이 실제로 사람을 향해 발포할 수 있었다는 혁신으로 이어졌다. 좋은 결과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 생리적 거부감(아마 양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 본능 중 하나이고, 태생적으로 이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본능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군인 훈련 과정은 '같은 사람에게 행하는 폭력'으로 내장되어 있을 프로그램 위에 다른 것을 덮어씌우고자 한다. 생각을 하지 않고 특정 상황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며, 해당 행위를 살해나 살인이 아닌 그보다 더 미묘한, 정의를 위한 공권력 행사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여기에 전쟁을 위해 상대 집단에 대한 증오가 덧붙여진다면 이제 최소한 주저하는 병사는 거의 없을 테다.



나머지 세부적인 내용들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이 주제가 현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니 말이다. 인류 문명의 역사가 생물체가 유의미한 진화를 하기에는 상당히 짧았던 데다 현대에 이를 요구하는 큰 인구 변화도 없었다는, 진화심리학에서 늘 이야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 전제를 하고 들어가면, 결국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고 아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크게 변하지도 않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동물인지를 어느 정도 알아야만 하지 않을까? 막연한 선악 개념이나 무의미할 정도로 얄팍한 허무주의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고 어떻게 이를 막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상술했던 게임에 대한 반대 논쟁도 사실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이것은 어떤 일반적으로 큰 주제-비디오 게임은 아동의 폭력성을 유발한다-로 다룰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비디오 게임이 흡사 군사 훈련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출 수도 있다는 구체적인 논의에서 다뤄져야 할 사안이다. TV, 영화 등의 영상물 역시 마찬가지이고, 단순한 폭력성에 대한 규제는 이 논의에 대한 반발만을 불러 일으키고 이 모든 연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시민들을 거세시킬 생각이 아닌 이상, 이런 접근은 아예 접근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한때 대영제국이 전세계에 수출한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살면서 그 영향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 않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으로부터 크게 달라지진 않은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밖, 수많은 문제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바깥의 영역에 대해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를 제공한다. 거창하고도 막연한 도덕론으로 문제를 재단하는 것보다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예전에도 생각했었고, 지금 와서 다시 한 번 읽은 뒤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오래된 명구처럼, 아는 것은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