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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신화는 고대인의 시간 관념에 대한 내용으로 대략 1947년쯤 파리에서 쓰였다. 그래서 독붕이들이 환장하는 엘리엇과 조이스를 요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으며 그 속의 고대로의 회기에 대한 염언을 읽어낸다. 연말정산이나 신년계획을 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하는 걸까? 물론 이런 피드백과정은 효과적인 성장을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다. 여기서 살펴볼건 고대인의 시점에서, 종교의 시점, 맥락에서 한 해의 시작과 마무리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거다. 고대인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다루는 건 고대인들의 시간 관념이다. 그들은 시간을 어떻게 여겼을까? 나는 시간을 '직선적이고 방향성이 있으며 정량적인 것' 정도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그러한 시간의 특성을 배재하고 시간을 순환적인 신화의 틀에 끼워맞춘다. 즉, 인간의 영원한 원형(신화)속 삶을 사는 것이다. 시간 얘기만 할거 아니고 여러가지 신화 예를 들거다.
들어가기 앞서 삶을 두가지로 나눠야 한다. 세속적 삶과 종교적 삶이다. 여기서 세속적 삶은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 일반의 삶이나 종교가 있으나 삶의 형태를 종교에 맞추지 않는 삶이다. 종교적 삶이란 삶의 형태를 종교에 맞추는 삶이다. 삶의 형태가 종교에 맞춰졌다면 혹은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준비는 끝났다. 여기서 믿음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형식 속에 자신이 들어가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말할 고대인은 이런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할거다. (책에서는 대충 전근대인까지만 적용했지만 나는 좀 더 광의로 사용한다.)
고대인의 삶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 당시엔 집이 곧 일터였다. 그러니 집, 이웃, 종교건물 정도가 그들이 이용하는 건물이었을거다. 건물을 지을 땐 착공식을 할때가 있다.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에 종교 건물이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이데아적인 이상의 현현, 하늘과 땅을 잇는 지점, 천상과 지저의 중간점등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여긴다. 신과의 접촉을 꾀하는 건물은 세상의 중심으로서 공사가 곧 천지의 창조를 나타낸다. 하느님의 의해 만들어진 신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이다. 만주 신화에는 버드나무 여신이 있는데 새끼줄, 생명을 나타내며 아이를 보호하는 여신이다. 이 지역에선 집에 긴 새끼줄을 묶어두고 아이가 태어나면 반대쪽 끝을 아이에게 묶어서 그 길이 만큼만 돌아다닐 수 있게 한다. 버드나무 여신이 있는 집은 세상의 중심이고 그 세상의 중심에 있는 아이는 보호 받는다. 마치 에덴의 동산의 인간처럼.
한 해라는 단위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는 인간의 문명에선 아주 중요하다. 당연히 농사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해의 시작과 끝이 있는 기간에는 축제가 있다. 사순절, 성탄절, 설날등등. 더 작은 단위에선 어떨까? 계절, 월, 주 단위로. 많지 않은 사람들이 한 해보다 작은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되돌아본다. 독붕이들의 월간정산은 여기서 신화적인 맥락을 갖는다. 메소포타미아에선 새해가 시작되면 왕이 마루둑 역으로 에누마 에리쉬라는 그들의 창조신화를 되풀이한다. 그럼으로 시간은 갱신되어 세계의 창조로 회귀한다. 세계는 갓 창조되었을 때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 주 한위로 평일엔 일하고 주말에 쉬는 것 또한 야훼의 천지창조의 반복이다. 이러한 시간의 갱신이 고대인의 사고의 기저에 깔려있다. 이러한 기저 속에서 삶을 원형으로 치환한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세속적 삶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존제하는 원형만이 가치를 가짐으로 그러한 원형으로 삶의 요소들을 치환시킨다. 약초가 효과가 있는 이유는 그걸로 실험을 해봤기 때문이 아니라 신화속 영웅이 그 식물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성스러운 산에서 처음난 식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의 갱신과 원형적 형태의 삶은 샐 수 없이 많은 신화와 종교적 삶에서 나타난다. 가까운 예로 카톨릭을 들어보자. 기독교에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럼으로 카톨릭 행사들은 예수의 삶을 따라간다. 사순절에서 십자가의 길까지. 그것들이 한 해에 일어난 게 아니라 시간순서로 하진 않지만 그런 행사를 통해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치환한다. 신자는 하느님의 아들이되고, 기적을 행하는 자가 되고, 원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자가 되고,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에 오른다. 뒤에서 하겠지만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삶의 고통과 불안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가 격은 수난으로 치환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매해 매해 신화적 삶에 자신을 집어 넣으면서 신자는 의미를 얻는다. 종교적인 삶에서 신자는 예수가, 부처가, 짜라투르스타가, 헤라클레스가 되는 것이다.
순환적인 시간은 파괴와 창조를 반복한다. 매주 야훼의 천지창조를 반복하고 매해 에누마 에리쉬를 반복한다. 보통 파괴는 불과 물을 통해 이뤄진다. 성격에서 노아와 메소포타미아 신화(아트라하시스)에서 우투나피쉬팀은 신이 일으킨 대홍수에서 살아남는다. 확실하진 않지만 인도의 파괴신 시바는 불?로 기억한다. 소돔의 타락한(세속적) 인간들도 불에 의해 멸망한다. 인도신화는 이 파괴와 창조의 반복이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건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것이고 창조는 그 파괴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파괴는 정화를 나타낸다. 즉, 세계를 파괴(정화)하고 재창조 한다는 뜻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고 창조되는 것이다. 시간은 갱신된다. 기도교에서 세례를 물로하는 이유는 물로서 삶의 세속적인 부분을 정화(파괴)하고 종교적인 삶을 살게(창조) 되는 것이다. 신부가 되는 과정중에 인간 ㅇㅇㅇ는 죽고 신부 ㅇㅇㅇ가 태어났다 하는 것도 있다, 불교에선 이마인가 손인가를 작은 불로 지진다고 들었다. 직접적인 의식, 시간의 갱신마다 반복되는 파괴와 창조는 지금도 독붕이들의 연말정산과 신년계획으로 발현되고 있다. 독붕이 들의 연말정산은 지나간 시간의 잘못을 반성(정화)하고 신년계획은 미래를 계획(창조)한다는 점에서 신화적인 맥락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불안정하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허무함, 무의미함, 공허함은 이러한 의미의 부제에서 온다. 이런 고통은 왜 현대인을 괴롭힐까. 그것이 바로 고대인들이 원형적인 삶을 추구한 이유다. 원형적인 삶의 요소란 의미와 동치다. 이 의미는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차있다. 하지만 원형적인 삶 속에서 고통이란 의미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 받는 이유는 자신들의 신을 등졌기 때문이다. 비가 안오는 것은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땅이 울리는 이유는 대지모신이 화났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을 붙이고 신을 인격화하고 그러한 신화의 자신의 삶을 집어넣어 고통을 감내한다. 이는 현대에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학교에 가서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갖고 잘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는 고대에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을 자본주의에 대입한 것이다. 다만 돈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엔 부족함으로 사람들은 허무함을 느낀다. 포스모던한 인간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내할 수 밖에 없다. 무너진 구조를 보고 이 모든게 무의미한 행위인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욥기가 떠올랐다. 욥기에 대한 해석으론 인간이 어찌 신의 뜻을 이해하랴 같은 해석이 있다. 당연히 이유없이 욥을 괴롭혔는데 신을 욕하기는 뭐하니까. 다른 해석으론 신조차 삶의 무의미한 고통은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섭나. 나는 괴로운데 이게 무의미한 고통이고 이를 해결할 방법조차 없다.
그런 점에서 신화적 맥락을 갖는 행동들, 위에 예를 든 것 말고도 많은 것들이 어떻게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밥 없이 살 수 없고 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니까. 마르크스와 니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허무주의에 대항하려 한 게 아닌가 싶다. 새로운 신화를 만들거나 자신의 삶 자체를 신화로 만들거나. 인간은 종교적인 삶으로 돌아갈 순 없으면서 그 삶을 동경하게 되버린 것 같다. 이제 진정 의미있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연말정산을 하고 신년계획을 세우는 건 건강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만든 인간의 지혜를 아직 다 이헤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진짜 ㅈ도 쓸모 없는 고민이지만 자유로운 개인이나 허무주의 같은 걸 생각하다보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건 없으면서 좋은 것만 쫓는 게 실용성에 세뇌당한 걸로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우위를 점하려고 도덕적 가십을 부리고 경제적 지위를 내세우는 게 중세인들보다 나은 게 뭔지. 차라리 피터슨 말대로 주말마다 성당에 가서 형식 뿐일 지라도 참회하는 삶이 낫다고 생각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의미 없으니까.
문단 순서가 좀 바뀐 것 같다. 이책, 영원회귀의 신화를 강력 추천한다. 이 글은 책의 내용에 없는 예시도 섞고 내 의견이 거의 절반이다.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도 추천이다. 철학은 신학의 하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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