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God Delusion>에서, 유신론의 그름을 드러내면서 그 자신의 망상을 드러냈다. 즉, 낙천주의의 나쁜 사례를 보여주었다. 낙천주의는 상황을 실제 있는 대로보다 더 낫다고 (또는 실제 있었던, 있을 것보다 더 낫다고) 믿는 망상적 신념(delusional belief)이다. 낙천주의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여기서 유관한 것은, 인간성과 인간 조건에 관한 낙천주의다. (optimism about humanity and the human condition) 그것은 유신론보다 훨씬 더 널리 퍼진 망상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유신론자건 무신론자건 가리지 않고- 묶는다. 도킨스 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존재하게 될 어마어마하게 작은 가능성을 주목하면서, 그는 우리 각자가 태어나서 얼마나 운이 좋은가 하고 놀란다. 그는 우리의 삶의 일초라도 낭비하는 것은 애초에 삶을 결코 제공받지 못한 태어나지 못한 수조 명의 이들에게 냉담한 모욕이 된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운이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태어나지 않은 유령들’은 ‘아라비아의 모래알의 수를 넘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킨스의 견해를 공유하기는 한다. 즉, 그들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혼란에 빠진 생각이다. 존재하게 되는 것은, 만일 그 대안이 더 나빴을 경우에만 행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은 전혀 나쁘지 않다. 사실 (20) 그것은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 비록 존재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삶의 기쁨을 경험해보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한 좋음들을 박탈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좋음을 박탈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존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존재가 전제조건이 되는 무수히 많은 해악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낙천주의자는,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지를 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도킨스 교수는 우리가 ‘우리 종의 삶을 위해 거의 완벽한 행성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 지구가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고 또 물과 음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행성이 삶을 (적어도 당분간은)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짚은 점에서는 옳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에 가까운all but perfect’ 것이라는 소리는 엉터리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대에 너무 덥게 살았거나 너무 춥게 살았다. 살지 못할 정도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락하기에는 너무 덥거나 너무 춥게 살았다. 자연 재해와 감염 질병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인다. 그러나 행성이 우리의 아픔 때문에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우리 자신의 신체가 어마어마한 고통을 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 실패를 안겨준 것이다.인간의 악의 수백만의 희생자들이 있다. 우리 행성의 더 운이 좋은 거주민들은 불편, 불안, 고통, 실망, 두려움, 슬픔, 죽음 그리고 그밖의 많은 것들을 겪는다. 이 해악들 모두는, 만일 그것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피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는 신념은, 그렇다면, 극도로 해로운 망상이다. 왜냐하면 그 망상은 괴로움을 겪는 추가적인 세대를 창조하는 것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깊이 망상에 빠진 이들은, 삶이란 내가 주장한 나쁨 근처에도 가지 않을 정도로 좋다고 한다. 그러한 이의제기자들은 신뢰할만 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질이 나쁜가를 과소평가하도록 이끄는 인간 심리의 잘 탐구된 특성들이 있다. 이 심리적 특성 중에 주요한 것이 ‘낙천주의 편향pollyannaism'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천주의에 대한 이런 끌림을 갖는다고 연구결과는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자주 회상하며, 사태가 얼마나 잘 흘러갈 것인가를 과대평가하고, 그들의 삶이 평균 이상의 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을.
도킨스는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경외심에 가득찬 놀라움의 감정에 대해서 미친듯 기뻐하며(rapturously) 말한다. 그러나 이 종교적 경외감에 상응하는 세속 판본은 삶의 의미있음에 대한 보증자(guarantor)가 전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신 없는 세계가 의미 있다는 증명이 될 수 없다. 우주와 인간 삶이, 유신론자가 통상 이야기하는 신이 부여한 그런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어떤 세속적인 대안으로 채워짐에 틀림 없다는 함의를 수반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우리의 삶이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결론을 피하기 위하여(to ward off) 도킨스 교수는, 한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이 만들고자 하는 만큼 의미 있고 또 경이롭다는 흔한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만이 우리 삶이 요구하는 유일한 의미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면, 종교적 삶이 망상에 토대를 두었을 때 조차도 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망상에 근거한 삶 역시 사람들이 그렇게 의미 있고 경이롭게 만들고자 선택한 이상 그만큼 의미 있고 경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삶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의 계획에 부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종류의 망상이다. 그것이 그 자신이 세운 계획에 부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다른 종류의 망상이다. 즉, 자신의 계획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가 철학적 염세주의와 진지하게 대결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서 세속적 낙천주의의 성가를 설교하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존재하게 될 어마어마하게 작은 가능성을 주목하면서, 그는 우리 각자가 태어나서 얼마나 운이 좋은가 하고 놀란다. 그는 우리의 삶의 일초라도 낭비하는 것은 애초에 삶을 결코 제공받지 못한 태어나지 못한 수조 명의 이들에게 냉담한 모욕이 된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운이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태어나지 않은 유령들’은 ‘아라비아의 모래알의 수를 넘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도킨스의 견해를 공유하기는 한다. 즉, 그들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혼란에 빠진 생각이다. 존재하게 되는 것은, 만일 그 대안이 더 나빴을 경우에만 행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은 전혀 나쁘지 않다. 사실 (20) 그것은 존재하는 것보다 낫다. 비록 존재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삶의 기쁨을 경험해보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한 좋음들을 박탈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좋음을 박탈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존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존재가 전제조건이 되는 무수히 많은 해악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낙천주의자는,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지를 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도킨스 교수는 우리가 ‘우리 종의 삶을 위해 거의 완벽한 행성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 지구가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고 또 물과 음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행성이 삶을 (적어도 당분간은)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짚은 점에서는 옳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에 가까운all but perfect’ 것이라는 소리는 엉터리다.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대에 너무 덥게 살았거나 너무 춥게 살았다. 살지 못할 정도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락하기에는 너무 덥거나 너무 춥게 살았다. 자연 재해와 감염 질병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인다. 그러나 행성이 우리의 아픔 때문에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우리 자신의 신체가 어마어마한 고통을 야기함으로써 우리에게 실패를 안겨준 것이다.인간의 악의 수백만의 희생자들이 있다. 우리 행성의 더 운이 좋은 거주민들은 불편, 불안, 고통, 실망, 두려움, 슬픔, 죽음 그리고 그밖의 많은 것들을 겪는다. 이 해악들 모두는, 만일 그것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피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는 신념은, 그렇다면, 극도로 해로운 망상이다. 왜냐하면 그 망상은 괴로움을 겪는 추가적인 세대를 창조하는 것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깊이 망상에 빠진 이들은, 삶이란 내가 주장한 나쁨 근처에도 가지 않을 정도로 좋다고 한다. 그러한 이의제기자들은 신뢰할만 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질이 나쁜가를 과소평가하도록 이끄는 인간 심리의 잘 탐구된 특성들이 있다. 이 심리적 특성 중에 주요한 것이 ‘낙천주의 편향pollyannaism'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천주의에 대한 이런 끌림을 갖는다고 연구결과는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자주 회상하며, 사태가 얼마나 잘 흘러갈 것인가를 과대평가하고, 그들의 삶이 평균 이상의 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을.
도킨스는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경외심에 가득찬 놀라움의 감정에 대해서 미친듯 기뻐하며(rapturously) 말한다. 그러나 이 종교적 경외감에 상응하는 세속 판본은 삶의 의미있음에 대한 보증자(guarantor)가 전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신 없는 세계가 의미 있다는 증명이 될 수 없다. 우주와 인간 삶이, 유신론자가 통상 이야기하는 신이 부여한 그런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어떤 세속적인 대안으로 채워짐에 틀림 없다는 함의를 수반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우리의 삶이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결론을 피하기 위하여(to ward off) 도킨스 교수는, 한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이 만들고자 하는 만큼 의미 있고 또 경이롭다는 흔한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만이 우리 삶이 요구하는 유일한 의미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면, 종교적 삶이 망상에 토대를 두었을 때 조차도 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망상에 근거한 삶 역시 사람들이 그렇게 의미 있고 경이롭게 만들고자 선택한 이상 그만큼 의미 있고 경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삶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의 계획에 부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종류의 망상이다. 그것이 그 자신이 세운 계획에 부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다른 종류의 망상이다. 즉, 자신의 계획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가 철학적 염세주의와 진지하게 대결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서 세속적 낙천주의의 성가를 설교하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거 그 반출생주의 교수가 쓴글인가
베너타
아마 맞을듯요. 제목이 기억이 안남;
어디서 퍼왔길래 각주가 붙어있노
유신론이 망상인 건 인정하네 ㅋㅋㅋ
유신론이 망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째서 개인의 삶이 주관적인 의미로 가득찰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도 납득하기 어렵네요.
이건 도킨스의 유신론 비판과는 무관한 비판 아님?
저 글은 그런 도킨스조차도 까고 있는겁니다.
그러니까 도킨스의 유신론 비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도킨스의 출생주의를 까는 거 아님?
유신론을 비판하면서도 개인의 삶이 주관적인 의미로 가득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순을 지적하는거죠. 말씀하시는 것도 포함하여 맞습니다.
결국 무신론의 현생 긍정을 비판하는 거 아님? 하지만 기독교의 출생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기독교의 염세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긍정하는 셈이 되는 건 반출생주의의 모순임
==> 염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염세주의가 뭔질 모르겠어서요.. 반출생주의는 그냥 애낳지 말자 아닌가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책 읽고 있는 거 아님?
이미 다 읽었습니다.
기독교가 천국을 강조하는 자체가 현생을 내려치기 하는 거임 결국 염세주의임 천로역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상은 죄와 더러운 인간들로 가득차 있음
제가 읽었을 때, 베너타는 딱히 종교적인 부분에 큰 관심이 없어보입니다. 논증을 펼치는데 있어서 모순될 부분이 있나요?
책을 읽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긴 힘들지만 책의 원제에서 부제를 보면 존재하기의 해악이라고 되어 있는데 목차까지 보면 실존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임 실존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태어나게 된 이 세상을 적극적인 기투를 통해 살아가야 한다는, 즉 반- 염세주의적 입장 아님?
읽어봤는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생식의 윤리성에 관해서만 논하지, 그외에 삶의 태도에 관해선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애초에 본인의 논증에 그런 내용은 필요도 없겠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하는거임?
저자는 그저 삶을 시작할 가치가 없다고만 말합니다. 말씀하신 논의 자체는 없는거 같아요.
115.86 이 사람은 혼자 뭐라는 건지 모르겠음. 뭔 기독교가 염세주의라는 건지 모르겠네. 기독교는 탄생 자체를 천국 갈 기회를 공짜로 준 것으로 보고 축복이며 감사하라고 말함. 근처 교회 가서 아무 목사님 붙잡고 물어보쇼. 뭔 염세주의 타령이지. 모르면 아는 척 좀 하지 말자
147.41/ 너나 모르면 떠들지 말자 기독교가 염세주의라는 건 기본적 사실이야 천국을 강조하는 자체가 현생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거다 진짜 기독교의 기본도 모르네 ㅉㅉㅉㅉ
창세기 1장 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라는 내용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전도서와 예레미야에 보면 염세적인 서술도 들어가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의 주장이 뭐임? 태어나지 않으면 고통도 쾌락도 없으니 그게 더 낫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의 핵심은 비대칭성 논증에 기대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