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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쯤에 보고 삘 꽂혀서 한번 재독해보려다가 얼마 안되서 다시 재독했다. 그 때는 일주일 거쳐서 읽어서 내용 까먹었는데 이번엔 이틀만에 주파해서 내용 별로 안까먹었다. 다시 읽어본 소감은 인상이 웅장하고, 초반은 영웅서사시를 연상케 했다. 천사편보다 사탄에 왠지 더 인간미가 갔다. 지더라도 꾸역꾸역 계속 도전해서 결국 하와를 타락시키는 데 성공함. 몇번 패배해도 계속 불굴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고, 고상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내면에 고뇌도 있어서 사탄에게 이입하게 만들어놨다. 왜 그렇게 해놓은걸까? 신기한게 기독교 문학이면서도 고대 그리스 이교도 신화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문체는 7년간 집필 기간에 한작품 갈고 닦은 만큼 우아함이 있다. 정제된 언어가 있다.


요새 나도 성경을 보고 있는데, 선입견과 달리 구약성경에 야훼는 가혹한 면모도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 배경은 구약성경 도입부에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고 낙원에서 쫒겨나는 과정에 치중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 사서 봐도 분량은 구약이 압도적이던데, 신약성경이 있어야 기독교고, 구약은 유대교 이슬람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작중에서 야훼는 그리스 신과 같이 투기에 넘치는 인간적인 신이 아니라 자비롭고 너그러운 신으로 묘사된다. 문학에서 사랑 그게 무슨 의미인가. 유약하고 의존적이고 주체성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사랑은 애교이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사랑은 관용이다. 후자가 중요하다. 신과 같은 사랑을 본받으려면 신과 같이 사랑해야한다. 인간적인 사랑은 결함이 많다. 그걸 보고 또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난할수도 있다. 그래도 간신배나 속은 음흉한 것들보단 낫다. 사랑하려고 해도 개새끼처럼 알랑거리지말고 품위 있게 사랑하자.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도 정치적인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도 통속적인 알랑거림이나 입바른 소리 같은 거 없었다. 사랑도 웃음이 없는 사랑이다. 웃음의 상징하는 바 애새끼의 해맑음 재롱을 의미한다. 성숙한 사랑이라하면 무표정한 사랑인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이 땅에서 믿음 및 양심과 관련된 것들에서 절대로 틀릴 수 없는 무오한 존재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하지만 많은 자들이 마치 자기가 그런 존재인 것처럼 행세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고수해나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극심한 박해가 생겨날 것이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외적으로 그럴 듯한 의식들과 장엄한 모습만 갖춘 종교로 만족할 것이다.'

나름 인상 깊은데 논리적인 흠을 발견했다. 무오한 존재란게 없다면서 다음에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왜 무오한듯이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인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은 왜 있는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됐는가? 힘에서 권력 권위에서 비롯됐다. 권위는 질서가 있는 곳에서 다 있다. 그렇다면 권위 있는 주류파 새끼들은 전부 믿음과 양심의 상대성 무시하는 오만한 개새끼라는 뜻이다. 그러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게 아니라 박해를 받으며 시험을 치루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밀턴은 이 대사에서 믿음과 양심의 상대성을 주장하며 따라서 권위주의적 믿음과 양심이 아니라 반권위주의적 믿음과 양심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종교적 격식보다도 개인의 양심을 더 우선시하여 믿음도 합리화 한다는 의미이다. 반권위주의적 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구절이다. 

밀턴 본인은 전쟁을 싫어하며 헌신적 인내를 더 고상하게 봤다는데, 초반에 영웅서사시 분위기를 묘사한 것은 사실이고, 난 전투씬을 흥미진진하게 봤다. 그리고 가장 캐릭터성이 살아난 것도 사탄이였고, 사탄은 반골이였다. 본의 아니게 인격이 투사되서 표현된 거 같다. 그런데 권위가 물리력을 통하여 억압한다면 대항할 무기도 물리력 외에 뭐가 있겠는가? 아니면 순한양 처럼 도살될 뿐이다. 밀턴 본인도 청교도 혁명 즉 잉글랜드 내전 동안 반란에 동참한 것이다. 인내보다 하찮지만 유혈항쟁은 무시할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믿음과 양심이 상대적이라면 신이란 것도 명목상의 존재일 뿐이다. 본보기 역할도 있고, 구원과 처벌을 정해서 믿음과 양심에 진정성을 훼손 시키는 역할도 한다. 일신교는 가부장제 아버지 처럼 시시건건 간섭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같은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들은 아버지한테 효를 명분으로 간섭하게 되고, 믿음과 양심의 상대성을 필연적으로 해치게 된다. 믿음과 양심의 자유를 지킬려면 우상을 파괴시켜야한다. 밀턴이 거기까지 이른 것 같진 않지만 계몽주의 정신의 과도기와 같은것 같다. 신이라는 고정관념 외에 새로운 잣대가 있어야하고 신을 통한 사랑이 아니라 양심에 따른 사랑이 필요하다. 양심도 정신적이든 정치적이든 소득을 보장해줘야한다. 그게 내세의 구원을 통한 양심이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신을 개입시키는 행위이다.


이야기 흐름이 원죄로 가는데 원죄라는 것도 있어야하는 지 모르겠다. 신의 자애로움과 나중에 예수의 구원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역시나 신이라는 고정관념을 개입시키는 행위이다. 어쨋든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영감을 준 책이다. 나도 다른 사람 포용하는 정신이 내 이권에 도움이 될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