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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는 몇 번을 읽어도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화자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허물어뜨리고, 직접 찍은 사진들을 묘사 사이에 삽입하면서 착각이 아니라는 양 자신의 경험 속에 그대로 이입하도록 요구하는데, 정작 이 멜랑꼴리한 회상 속에 완전히 잠기고자 하면 번번히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그저 현실의 자료들 위에 쌓아 올린 허구적인 무언가라는 걸 몇 번이고 확인시켜준다. 물론 2022년 지금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어디 제발트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만, 여전히 제발트만의 무언가는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토성의 고리>는 약간 특이한 이유로 재독하게 되었는데, 올해 6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행성들이 정렬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급작스럽게 소위 사트루누스의 음침한 영향 아래에 있는 삶이 떠올랐고, 크툴루 같은 코즈믹 호러를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행성들이 제자리를 잡는 날" 아래에서 이 우울한 여행을 읽어보고 싶어진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발트 소설 중 <아우스터리츠>를 가장 좋아하기는 한다만, 이 제목이 주는 임팩트는 참을 수 없다. 도재명의 <토성의 영향 아래에서>를 들으면서, 약간 기분을 내는 느낌으로.
https://youtu.be/5rFIzQ3PaSs
다만 다 읽고 나니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와는 조금 지엽적이게 다른 감상이 마구 떠올랐는데,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적 주제인 '희생자주의'에 대한 부분이다. <토성의 고리>는 제발트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 억눌린 자들, 희생된 자들에 대한 착잡한 회상을 요구한다. 시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억눌린,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 받고 죽고 내몰린 아웃사이더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성에 공감하였을 테고,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다가 다양한 희생자들, 보스니아 내전의 시체들이나 태평천국의 난 시절의 죽은 이들 이야기 속에서 아주 잠시 아일랜드인 노예에 대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을 때, 요상한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휙, 하고 여기에 붙잡혔다.
제발트는 당연하다는 듯 아일랜드인들이 서인도제도로 노예로 팔려나간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아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규모의 아일랜드인들이 마치 흑인 노예처럼 영국에 의해 팔려나갔다는 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은 고의적으로 과장한 글에서는 그런 아일랜드인들이 주로 성적으로 착취당했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그에 대한 자료로 <White Cargo>와 같은 책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더 찾아보니 이는 결코 일반적인 학설이 아니었고,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들은 대체로 흑인 노예 무역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그 과정에서 아일랜드인들이 맡은 역할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있는 애매한 계약직 노예를 실제에 비해 과장하는 서술로 가득한 듯했다.
이를 짚어나가는 과정에서 제발트의 소설의 문학적인 표현들은 어느새 뒤로 모습을 감췄고, 열띠게 피어오르는 희생자와 그 자격 박탈을 위한 정치적 싸움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했던 멜랑꼴리 역시 차갑게 식은 돼지 기름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엉겨 붙은 라드 속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식 속에서 새롭게 정립되는 현실과 역사, 그렇게 현실은 이야기가 되고 같은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기계가 된다는 테리 이글턴식의 비평, 역사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극적으로 이를 끼워맞추는 데에 더 신난 사람들, 최근 알게 된 이후로 완전히 경악한 나무위키의 잔 다르크 항목 관련 역사 왜곡에 대한 혐오 등이 섞여 있었고, 결국 8장에서 책을 덮고 이 감상을 쓰고 있다.
가끔, 생각을 조금 줄이는 편이 살면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생각이라는 것이 생각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이겠지만.
찌들어버렸네 - dc App
제발트 뭐부터 입문하면 좋나요? 그리고 님의 베스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