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 나보코프 해설 들어보면
번역서로 읽는 독자라면 나보코프의 어떤 작품이든
제대로 이해했거나 저자 특유의 기표 놀이를 같이 즐겼다거나 하는 독자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
알지도 친하지도 않은 저자를 도대체 어떤 논리로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보코프 기준으로서는 한국에서는 자기 책이 읽힌 적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로쟈 나보코프 해설 들어보면
번역서로 읽는 독자라면 나보코프의 어떤 작품이든
제대로 이해했거나 저자 특유의 기표 놀이를 같이 즐겼다거나 하는 독자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
알지도 친하지도 않은 저자를 도대체 어떤 논리로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보코프 기준으로서는 한국에서는 자기 책이 읽힌 적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문학의 본질은 언어 유희 이상의, 심지어는 언어 이상의 정신적 운동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그런 운동의 정교함이 없는 작가라면 천재적 언어 유희가 아무리 많아도 어차피 무의미) 원어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라는 말은 얄팍한 엘리트주의에 불과하다고 봄.
이상의 봉별기 중 "이상 옥상" 같은 언어 유희는 아마 번역하기 어렵겠지. 그런데 그걸 번역 못한다고 작품의 본질이 훼손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음. 언어란 게 사실 별게 아님. 언어 유희는 언어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원어로만 가능한 어떤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게 아니고.
그렇다면 작품을 통해서 저자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님? 독서 후 남는 것이 나보코프와 분리된 작품 자체로서의 정신 활동인데. 롤리타는 옹호할 수 있더라도 저자가 어떻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지.
작품을 저자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도 없고, 작품을 저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 순수한 "작품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ㅅ하지만 작품의 구성적 일관성으로서의 개인 저자는 번역본이든 원본이든 언제나 감각되고, 핵심적인 존재지.
결국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리느냐는 독자의 중요한 개인적 독서 과정이라고 생각되네. 정해진 답이 없으니......
그 과정에서 독자의 오독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독자가 실제 저자를 능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저자를 깊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 독서는 통념보다는 매우 복잡한 행위인 듯.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사라지는데 도대체 누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독서가 개인이 만들어낸 대상이겠지. 혹은 그냥 자신을 이해했거나. 결론은 번역서를 읽은 것을 가지고 저자에 대해서 떠드는 것은 잘못됐다임.
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나보코프 러시아어로도 읽어봤지만, 번역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다 사라질 정도로 엄청나게 원어에 매여 있는 건 별로 없었음. 기표의 유희 같은 것보다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처럼 억양이 다채로운 게 훨씬 더 번역하기 더 어려운데, 그런 억양들도 충분히 번역 가능.
그리고 또 물을 수 있는 게, 어떤 평범한 원어민 독자가 있어서 나보코프의 문체의 모든 뉘앙스와 언어 유희를 하나하나 다 느낄 수 있다고 쳐도, 그 독자가 19세기에 태어난 러시아 귀족 출신 망명자 작가의 정신 세계를 외국인 전문가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 요즘은 비교문학에서도 외국어 여러 개 배울 필요 없이 그냥 영어 번역본으로 다 읽어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인데, 원어라는 게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엄청나게 절대적으로 비밀스런 뭔가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음.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았는데도 그정도로 쩔면 도대체 원어로 읽으면 얼마나 쩐다는거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복잡한데 엄밀히 따지면 작가가 쓴 원어가 아니면 그가 설정한 언어유희나 세세한 디테일들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근데 번역으로도 그가 이룩한 엄청난 성과 중 일부에서 우리 해외 독자는 충분히 즐길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봄. 오히려 번역가가 그의 우수한 시선으로 작품의 장점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