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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가가 등장인물의 모든 심리를 다 말해주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아왔었는데
기묘한 심리에 대한 묘사나 장치가 보인다. 그리고 오류처럼 보이는 거도 발견했는데..
a.
[이튿날 저녁때 환이는 제가 입은 제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여자를 묻었다. 얼음조각같이 싸늘한 달이 능선 뒤에 댕그마니 걸려 있었다. 꺼무꺼무한 능선과
맞붙은 하늘을, 환이는 그 푸른 은빛 나는 하늘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환(幻)이다.
바람개비같이 돌고 있는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지금 없는 것이다. 진실로 없는 것이다. 자취 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던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버린 바람이었던 것이다. 여자와 더부어 영원히 사라져벌니 바람이었던 것이다.
능선을 감싸듯 푸른 은빛의 밤하늘,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저 머나먼 곳에서 다시 여자를 만날 수 있는가
환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 장면에서 저 '환'이다라는 표현 엄청 거슬리지 않은지? 일반적으로 환상이다라고 쓰이거나... 헛것이다라고 쓰이거나..
그런데 한자까지 병기해서 한글자 달랑... 그것도 김환의 시점에서.
b.
["너 나를 막볼 참이구나."
"네에. 막보아도 무방하구 처음 본대도 상관없소이다. 십여 년 세월 수천수만 번을 보아와도 늘상 처음이었으니까요."]
처음 읽을 땐 '막 대하려는 참이구나' 정도로 해석을 했고 그렇게 해석했어도 문제가 없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마지막으로 볼 생각이니 막 대하는구나'라는 의미가 정확한 거 같은데 길상의 답변이 묘하다
막 대하니까 마지막으로 보냐고 묻는 답변에, 10년간 수천 수만 번을 봐도 처음이었다 말하면... 그 정성을 무엇으로 봐야할지?
길상은 그의 의식이 묘사되는 대로 서희를 동생으로만 여겼는가?
c.
["그래 이거는 내 생각이네만 그 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홍이 처지로서도... 길가에 버릴 수는 없는 돈 아니가?
그러니 독립운동 하는 곳에 기부하는 게 좋겄다. 홍이에미가 홍이에게 남긴 거라면 홍이가 그걸 맡아서 독립운동 하는 데 썼다 할 것 같으면 과히, 안 그렇나?"
"아제!"
길상이 용이 팔을 꽉 잡는다.
"아제!"
"나보고 그럴 것 없다."
"어찌 그리 못살았습니까. 아제하고 아지매는,"
"아니다. 우리는 많이 살았다.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았네라."]
잘 살아야 될 사람들이 어찌 그리 불행히 살았느냐는 질문으로 들릴 맥락에서
'많이 살았다, 살 수 있는 데까지'라고 한다면 어찌보면 동문서답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히 살고 행복히 살고를 떠나 자신의 삶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다면 나올 답변이 아닌가.
아쉬움이 없으니 살만큼 살았노라...
묘하게 아름다운 문답.
d.
[자넨 선견지명이 있었지. 그래, 오백 년은 너무 길었어. 오백 년 동안에 된 또랑은 너무 깊었거든.
하기야 설피 한 켤레에 몸을 담고 설원을 질러가는 지독한 이곳 젊은이들의 그 지독한 욕설이야 당연하긴 하지.
서울서는 문벌 좋고 유복한 집 자제들이 주색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것으로서 절개가 되는,
아아 그러니 의암을 희롱하고 이 나를 희롱한들 내 무슨 말로 대꾸할꼬]
이동진의 오열 장면인데, 최치수의 선견지명 운운하는 장면이 있어서
2부와 1부에서 최치수 나오는 장면을 낱낱이 살펴봤는데
그런 장면 없던데?? 오류라면 오류 아닌가 싶기도...
최치수가 나와서 말 많이 하는 파트는 대체로 아랫것들을 권위로 찍어누르거나
고상한 것을 귀히 대하는 파트인데...
특히 환이 파트가 굉장히 기묘하다면 기묘하고...
b와 c로 미루어보아 박경리 선생은 역시 사랑꾼이 분명하다.
d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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